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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지 예산’을 아십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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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제목부터 여성계가 섭섭해할 수 있겠다. 본격적으로 얘기가 나온 지 벌써 1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모르느냐고. 실제로 이 예산은 2001년 한국여성민우회가 자치단체 예산을 도마에 올려놓고 처음 분석했다. 그 후 국회와 여성계 주도로 논의가 이어지다가 2006년 말 제정된 국가재정법에 도입됐다. 3년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지난해 가을 국회에 제출된 올해 예산안에 처음으로 성인지 예산서가 첨부됐다.

성인지 예산(Gender Sensitive Budget)은 예산이 여성과 남성에 미치는 영향을 미리 분석하고 평가하자는 것이다. 여성과 남성의 경제·사회적 역할과 상황, 수요 등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나랏돈을 쓰면 현재의 성 불평등 상태가 계속 유지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나왔다. 이를테면 이런 불평등이다. 외교통상부는 ‘글로벌 리더십 국제관계 장기연수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정부와 공공부문에서 국제관계 전문가를 키우자는 아름다운 취지에서다. 부처 산하 외교안보연구원에서 정부의 국·과장급 공무원과 공기업 간부급을 대상으로 43주간 장기교육을 한다. 사업 첫 해인 2008년엔 연수자 31명 중 여성이 1명, 2009년에는 36명의 연수자 모두 남성이었다. 매년 5억원 안팎의 국민 세금이 들어가는데 왜 수혜자는 남성 위주일까. 게다가 외교부는 이 사업을 올해 성인지 예산에 넣지도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10월 정부가 제출한 성인지 예산은 195개 사업에 예산규모는 7조3144억원으로 총지출 예산 292조원의 2.5%다. 제출 대상인 51개 정부 부서 중 29개 기관만 ‘답안지’를 냈다. 대통령실·국무총리실·감사원·공정거래위원회·경찰청·관세청·식품의약품안전청 등 22개 기관은 아예 예산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부서 성격상 성별 수혜분석이 힘들어선지, 아니면 관심 부족 탓인지 알 수는 없다. 물론 공무원의 고충은 이해한다. 예산을 짜는 힘든 과정에서 성별을 따져 가욋일까지 해야 하니 부담이 없을 순 없다. 예산 당국 입장에선 각 부처가 성인지 예산임을 강조하며 ‘삭감 불가’를 은근히 내세우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 등이 주도한 국가재정법 개정안이 지난달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내년도 예산에는 공공기금 사업도 성인지 예산에 포함된다. 노동부처럼 기금 돈을 많이 쓰는 부처의 사업도 성인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국민의 관심도를 높여야 한다. 그래야 공무원도 움직인다. ‘성인지’ 하면 너무 딱딱하고 피부에 와닿질 않는다. 단골로 등장하긴 하지만 남녀 화장실 문제처럼 남녀가 함께 공감하고 단박에 알 수 있는 참신한 사례를 더 좀 찾았으면 한다. 여성이 남성보다 화장실을 오래 쓰게 마련인데도 여성 화장실 변기 수는 남성 화장실 대·소변기 수보다 적어 여성들은 늘 화장실 앞에서 길게 줄을 선다. 그런 여성을 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던 남성도 얼마든지 성인지 예산의 응원군이 될 수 있다.

서경호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