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기형도 '기억할 만한 지나침'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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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 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기형도(1960~1989) '기억할 만한 지나침' 중

나는 기형도 시인을 알지 못한다. 알 사이도 없이 가버렸다. 그가 사라진 뒤 『입속의 검은 잎』이라는 무서운 제목의 시집을 기애도 라는 분이 보내주었다. 1989년 여름. 몇번의 여름이 지나도록 나는 무서워서 그 시집을 읽지 못했다. 이제는 읽어도 무서움은 덜해졌지만 유독 한자로 표기한 두 글자 '書記'가 자꾸 슬프다. 눈오는 날에는 슬픔도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는다.

김화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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