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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연 ‘저출산 보고서’ 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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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지난주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표한 ‘저출산 극복을 위한 긴급제언’ 보고서는 저출산이 초래하는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이렇게 그렸다. 여성이 평생 낳는 아이가 평균 1.15명에 불과한 현재의 초(超)저출산 현상이 계속될 경우 2100년 인구가 절반으로 줄고 2500년엔 현재 인구의 0.7%인 33만 명으로 축소된다고 한다. 이 정도면 민족이 소멸하고 한국어도 사라질 위기라고 했다. 장래 추계인구는 출생률·사망률이나 국제 이동 등 전제조건이 바뀌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니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평소 점잖은 경제연구소가 왜 이렇게까지 과격하게 표현했을까.

보고서가 내놓은 대책은 더 파격적이다. 출산이 노후보장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자녀가 많은 이에게 국민연금 지급액이나 실업급여를 더 늘리자는 주장이 눈에 띈다. 자녀가 커서 사회보험료를 내게 되면 그만큼 재정에 기여를 많이 하는 셈이니, 이를 감안해 혜택을 더 주자는 논리다. 자녀 교육비를 지금과 같은 소득공제가 아니라 세액공제를 해주고 중산층에도 양육수당을 주며, 신혼부부의 소득공제 항목에 결혼공제를 추가하자는 주장도 있다. 심지어 다자녀 가정의 차량에 공영주차장을 무료로 개방하고 놀이공원의 탈것 이용 시 줄을 서지 않아도 되는 ‘익스프레스 라인’ 이용권을 주자는 내용까지 있었다. 마치 ‘이래도 아이 안 낳을래?’라고 목청을 높이며 ‘출산용 종합선물세트’를 내놓은 것 같다.

읽기엔 속이 시원했다. 인터넷 댓글도 보고서에 대한 호평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고 주장만 강한 여느 정치인의 선거공약 같다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보고서가 제시한 정책의 대부분은 결국 나랏돈을 퍼줘야 실행할 수 있는 일이다. 나라의 곳간지기인 기획재정부에 물었더니 예상대로 난색을 표했다. 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저출산·고령화로 돈 쓸 데는 많아지고 세금은 덜 걷히는데 재정건전성은 왜 감안하지 않느냐”고 했다. “교육비를 세액공제할 바엔 아예 차라리 대학까지 무상교육을 하는 편이 낫다”는 말도 했다. 특히 상속세율을 자녀 수에 따라 대폭 인하하자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상속세를 내는 이는 극소수뿐이며, 상속세를 낼 정도의 부자라면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 출산을 기피하진 않을 테니까.

3월 초 어느 신문이 오피니언 리더를 대상으로 정부 정책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싱크탱크를 조사한 결과, 삼성경제연구소와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압도적으로 선두에 꼽혔다. 이런 무게에 걸맞게 좀 더 균형 잡힌 정책 대안이 나왔으면 한다.

서경호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