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칭병 (稱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병을 핑계로 거부나 불만 같은 부정적 의사를 표시하는 것을 칭병(稱病)이라고 한다. 칭병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몸이 아프다는 데야 윗사람인들 어쩔 도리가 없으니 가장 편한 핑계다. 그래서 예부터 칭병은 신하가 군주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방편으로 애용돼 왔다.

때로는 투정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 칭병은 강력한 의지표현이 되기도 한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 제3강 '봉공육조(奉公六條)' 에서 "조정에서 내려온 명령을 민심이 기뻐하지 아니해 봉행할 수 없으면 마땅히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라" 고 가르치고 있다.

민주당 김중권(金重權)대표가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그제 한때 당무를 거부해 여권에 반짝 파문을 일으켰다. 아픈 몸이 갑자기 낫는 것도 아닐 텐데 한나절 만에 당대표의 자리로 돌아간 걸 보면 칭병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칭병 하면 우선 떠오르는 정치인이 김종필(金鍾泌)자민련 명예총재다. 3당 합당으로 생긴 민자당 최고위원으로 있던 1992년 7월 JP는 허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청구동 자택에 드러누웠다.

대선을 앞두고 YS가 당총재직을 노태우(盧泰愚)대통령으로부터 물려받게 되면 공석이 될 당대표직을 JP에게 넘겨주지 않고 빈자리로 둔다는 청와대측 구상이 알려지면서 JP가 칭병으로 몽니를 부린다는 추측이 무성했다. 칭병인지 와병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JP는 당무 거부로 맞선 끝에 당대표를 따냈다.

JP를 당대표에서 배제하는 구상의 주모자 가운데 한명으로 의심받은 인물이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이었던 김중권 대표라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JP는 자민련 총재로 있던 95년 9월에도 병을 이유로 보름간이나 두문불출해 '칭병정치' 라는 조어까지 탄생시켰다.

같은 시기 신한국당 대표였던 김윤환(金潤煥)씨도 대표교체설만 나오면 갑자기 아프다며 당무를 거부했다. 그 때마다 아픈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일거라고 참새들은 입방아를 찧었다.

칭병해서 이득을 보는 경우도 있지만 본전도 못챙긴 경우도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의 문무왕편을 보면 대당총관이었던 진주와 남천주총관이었던 진흠이 거짓으로 병을 핑계삼아 나랏일을 소홀히 하자 문무왕이 이들과 함께 일족을 멸했다는 기록이 있다.

문무왕이 왕이 된 지 2년째 되던 662년의 일이었으니 레임덕의 권력누수를 걱정할 상황이 아니었다. 칭병도 누울 자리 보아가며 해야지 잘못하다가는 망신만 당한다.

배명복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