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파문 커지는 '정부 보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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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진념(陳稔)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27일 지난해 부도위기에 빠진 현대건설을 지원하기 위해 공기업인 한국토지공사에 '경제부처 장관 집단 보증서' 를 써준 사실을 시인했다.

행정 절차와 법을 잘 아는 陳부총리가 부채에 시달리는 공기업에 '각서' 까지 써주며 현대를 지원하도록 한 데는 절박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토공의 부실이 현대(약 1조2천억원)보다 10배에 육박하는 11조원 규모인터에.

경제팀 수장으로서의 그의 입장은 몇가지 점에서 이해가 간다.

우선 현대가 금강산 관광, 소떼 방북 등으로 대북사업을 일군 업체라는 점이다.

그런 현대가 부도나면 정부의 햇볕정책이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 냉전으로 치러야 할 군사비용을 고려할 때 현대를 돕는 게 손익계산상 더 낫다는 논리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현대를 부도 내면 나라경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국면에 빠질 것이라는 고민도 했을 것이다. 현대건설은 지난해에 23억달러어치의 해외수주를 따낸 국내 1위 업체다. 그렇지 않아도 대우그룹.동아건설이 부도 나 해외 신인도를 잃고 수주가 급감하던 때다. 실업문제도 큰 부담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권 등에서 끊임없이 제기했던 현대그룹 특혜지원 의혹이 이번에 처음으로 사실로 밝혀진 만큼 정부가 치러야 할 대가는 만만치 않을 것이다.

우선 경제팀에 대한 신뢰가 크게 훼손됐다는 점이다. 당장 경영 투명성을 외치며 재벌정책을 진두지휘하던 陳부총리는 정작 정책의 투명성을 지키지 못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게 됐다.

또 정부가 어떤 기준으로 누군 도와주고, 누군 퇴출시켰느냐는 항변들도 쏟아져 나올 것이다. 게다가 이번 문서 확인으로 한국관광공사의 금강산관광 사업 참여, 하이닉스반도체 지원 등 특혜 논란이 재연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쯤 되면 정부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자꾸 궁색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저질러진 일을 원점으로 돌릴 최선책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저간의 사정을 제대로 공개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차선책을 밝혀야 한다. 수년 뒤에 나타날지 모를 더 큰 부실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김시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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