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일, 반성없는 피폭기념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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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6일은 일본 히로시마(廣島)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56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반세기가 넘은 세월이지만 그 상처는 아직도 깊게 남아 있다.

지난 1년 동안 히로시마에서만 피폭자 4천7백여명이 사망해 일본 내 사망자만 총 22만1천여명에 이른다. 한국인 가운데도 일제에 징용당해 왔다가 피폭돼 지금도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때문에 역설적으로 원자폭탄은 평화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케 하는 단어가 됐다.

이 날은 21세기 들어 처음 맞은 기념일이어서 어느 때보다 평화에 대한 염원의 목소리가 높았다. 히로미사 시내 평화기념공원에서는 5만여명의 피폭자.유족들이 참석해 원폭 희생자 위령식 및 평화기념식을 열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 등 많은 중요 인사들도 자리를 같이 해 평화를 강조했다. 총리는 이날 기념사를 통해 "원폭의 참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항구평화의 실현에 전력을 다하겠다" 고 말했다. 그러나 고이즈미의 말을 들으면서 '말보다 행동이 중요하다' 는 평범한 격언이 다시 생각난 것은 왜 그럴까.

가해자인 일본이 전쟁 후 밟아온 행보를 보면 진정한 평화를 위해 노력한 흔적이 매우 적은 데다 최근에는 과거 침략의 사상적 배경이었던 우경화 현상도 두드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평화의 정착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의 하나는 과거 불행했던 역사에 대한 명확한 정리다.

가해자는 잘못을 반성하고 피해자는 용서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화합의 관계가 형성된다.

독일은 지금까지 피해자들을 찾아 보상하고 사과하는 행동을 보였기 때문에 주변국들의 승인 아래 평화통일이란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과거의 침략에 대한 반성.보상에 매우 인색하다. 심지어 같은 피폭자인데도 일본 밖의 한국.중국인 등은 외면하고 있다. 고이즈미도 이날 과거에 대한 반성은 언급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침략역사를 미화한 역사교과서를 인정하고 고이즈미는 계속 야스쿠니(靖國)신사 공식참배를 주장하고 있다.

일본은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안에 평화기념관의 설명문에서도 일본의 전쟁 책임을 명시한 부분을 삭제하려 하고 있다.

일본으로서도 숨기고 싶고 왜곡하고 싶은 과거일 게다. 그러나 이런 행동이 거듭된다면 진정한 평화란 오기 힘든 법이다.

오대영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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