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중국 국경 탈북자 르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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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중국 옌볜(延邊)지역의 탈북자들이 모두 한국행을 희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최근 들어선 서울행 꿈을 포기하고 북.중 국경을 넘나들며 중국지역에서 돈을 벌거나 금품을 얻어 북한 가족들의 생계를 해결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옌지(延吉)시내 한 사우나탕에서 일하고 있는 김석철(27)씨는 "1999년 처음 탈북한 뒤 때밀이 일을 해서 번 돈을 부모님과 형 식구가 살고 있는 함북 온성군에 가끔 인편으로 보내고 있다" 고 말했다.

"액수가 얼마냐" 는 기자 질문에 "구체적으론 밝힐 수 없으나 꽤 된다" 면서 "한번 때를 미는 데 10~20위안 정도 받는다" 고 답했다.

북한의 엘리트층인 사회과학원 박사의 월급이 북한돈으로 2백70원이다. 그런데 중국 내에 실제로 거래되는 북한 돈의 가치는 매우 떨어져 있어 중국돈으로 환산하면 10위안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때를 한번 밀어주고 북한 사회과학원 박사의 월급을 받는 셈이다.

탈북자들이 서울행을 꺼리는 이유 중의 하나는 지난해 남북 정상회담 이후 탈북자들에 대한 한국 정부의 관심이나 대우가 예전 같지 않다는 점이다.

현지 선교단체의 A씨는 "북한을 자극할 수 있는 귀순 기자회견 등이 없어진 점은 한국행에 따른 부담을 덜 수 있는 대목이지만 정착지원금이 과거에 비해 턱없이 적어졌고 취업 등이 쉽지 않다는 점을 이 곳의 탈북자들도 잘 알고 있다" 고 말했다.

98년 71명이던 탈북자는 99년 1백48명, 2000년 3백12명으로 갑절 이상 늘어나는 추세인 데다 올해는 지난달 말 입국한 장길수군 가족을 포함해 모두 2백25명이다.

급증하는 탈북자에 대해 한국 정부가 과거 같은 재정적 지원을 해줄 수 없는 상황이지만 탈북자들은 여전히 "죽음을 무릅쓰고 북조선을 탈출한 '귀순용사' 로 대접받고 싶어한다" 는 게 현지 지원단체 관계자의 얘기다. 정부는 현재 탈북자 1인당 주거지원비 7백54만원을 포함해 3천7백만원을 지원하고 있다.

북한 당국의 북송(北送)탈북자에 대한 처벌이 느슨해진 점도 서울행보다 중국 체류를 선호하는 이유로 꼽히고 있다.

옌지시 공안국 고위 간부는 "조선(북한)이 최근에는 탈북자에 대해 국경 인근 교화시설에서 15일간의 징역만을 살린 뒤 귀향조치하고 있다" 면서 "이들 중 상당수는 다시 중국으로 나와 돈벌이 등을 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고 전했다.

그렇지만 가족단위로 나온 경우는 여전히 서울행을 선호하고 있고, 점차 그 숫자가 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북한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은 데다 중국 내에서도 은신이 어렵고, 자칫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지난해 탈북자 50가족이 서울행의 꿈을 이루고, 올해는 벌써 39가족이 입국한 것은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옌볜 탈북자 지원단체의 B씨는 "상대적으로 중국 체류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족단위 탈북자의 보호와 서울 입국에 정부가 우선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 이라고 말했다.

옌볜에서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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