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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뉴딜, 시대착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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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보수주의자란 두 발이 멀쩡한데도 한걸음도 앞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소아마비를 앓았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말이다. 대공항 상태의 미국 경제를 살리려고 그는 뛰어난 지도력과 화술을 바탕으로 뉴딜정책을 도입했고, 국민의 단합을 이끌어냈었다. 재선에 나섰을 때는 선거인단의 98.5%를 확보하는 기록적인 지지를 얻었으며 지금도 미 국민들로부터 링컨.워싱턴과 같은 수준의 추앙을 받고 있다.

최근 정부 여당에서 그를 흠모하는 듯한 발언이 나오는가 하면 한국판 뉴딜정책을 도입하겠다는 발표가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 보면 한국 경제의 상황에 맞지도 않는 발상일 뿐만 아니라 그동안의 정부 입장과도 상치되는 부분이 많아 부작용과 혼란을 불러올 위험이 있다.

뉴딜은 자본주의가 그 구조적인 문제점 때문에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 도입된 정책이다. 미국의 국민소득이 4년간에 반토막이 나고 실업률은 25%를 넘었을 때 나온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서 지금 뉴딜인가. 얼마 전만 해도 정부는 경제위기설이 언론의 책임이라고 몰아세웠는데 정말 위기 때나 써야 할 뉴딜식 종합투자대책이 왜 필요하다는 것인지 의문이다.

참여정부는 출범 초부터 "인위적인 경기 부양은 없다"고 강조해 왔다. 과거 정권들과의 차별화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경기가 위축되자 정부가 나서서 대규모 건설사업을 추진한다는 한국식 뉴딜이란 과거 정권의 경기부양 방식과 다를 바 없다. 이 점에 관한 정부의 솔직한 해명이 필요하다.

미국 뉴딜이 추구했던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들은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정착돼 있다. 대규모 공공사업은 말할 것도 없고 최저임금제를 포함한 노동자의 권익 보호 장치, 사회보장제도, 중앙은행제도, 예금보험공사, 공정거래위원회, 금융감독원 등이 이에 포함된다. 우리의 경우는 정부 규제나 노사분규가 심각한 투자 장애요인이 될 정도로까지 한발 더 앞서 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또 뉴딜식 발상의 정책들이 필요한 것인가?

경기가 지나치게 위축되었을 때 재정부문이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은 용인될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에도 가능하다면 재정지출을 확대하는 것보다는 감세조치를 통해 민간부문의 활성화를 도모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돈이 아니라 남의 돈이나 임자 없는 돈을 쓰게 될 경우에는 함부로 인심을 쓰며 낭비하기 쉽기 때문이다. 더구나 잘못된 대규모 공공투자는 겨우 잡아둔 부동산 투기를 다시 부추길 위험이 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한다면 지금은 이미 비대해진 정부가 뉴딜이란 새로운 간판을 내걸고 나서기보다 민간부문의 활성화를 유도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가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힘은 더 들고 생색은 나지 않겠지만 정부규제를 풀고 노사관계 개선을 도모하는 데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간기업이나 해외기업들에 투자환경을 개선해 줄 노력은 팽개친 채 경기가 안 살아난다고 정부가 연기금에서 돈을 끌어다 물 뿌리듯 쓰겠다는 발상은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이라 하겠다.

뉴딜식 정책이 언제 어디에서나 정치적 또는 경제적으로 효험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잘못 흉내내다간 엄청난 재앙만 불러올지도 모른다. 후버 대통령은 뉴딜 정책을 트로이의 목마에 비유하곤 했다. 속내용을 잘 모르는 국민이 비상시를 강조하는 정부에 등 떼밀려 받아들이긴 하지만 그 속의 독이 결국은 나라를 망치게 한다는 경고의 뜻을 담고 있다. 지금 시점에서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노성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