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정치자금 세탁은 괜찮다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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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각계의 따가운 눈총에도 아랑곳없이 여야는 정치자금과 탈세를 제외해 알맹이 빠진 돈세탁방지법(범죄 수익 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 등)을 통과시킬 태세다.

탈세가 제외된 것도 논란거리지만 돈세탁을 방지하자며 만드는 법안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불법 정치자금을 빼려는 처사는 정치권의 자기보호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일부 의원의 반대로 어제 법사위 처리에 제동이 걸렸지만 여야가 모처럼 한마음이라 그대로 통과될 가능성이 크다. 노상 티격태격 싸움질인 여야가 공통의 잇속 앞에선 짝짜꿍이니 뻔뻔스러움과 몰염치에 기가 막힐 지경이다.

돈세탁방지법은 1997년 한보 사건 여파로 처음 국회에 제출됐으나 여야 의원들이 심의를 기피하는 바람에 자동 폐기됐다. 당시에는 정치자금도 규제 대상에 포함돼 있었으나 지난해 정부가 이 법안을 다시 제출하는 과정에서 탈세와 함께 빠졌다. 정부는 "불법 정치자금은 정치자금법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죄로 규제가 가능해 제외했다" 고 설명하지만 정치권의 압력이 작용했다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정치자금을 제외한 데 대해 여야는 '정치자금은 국제기구가 규제 대상으로 삼고 있는 마약 및 조직범죄와 같은 반인륜.반사회적 중대 범죄의 자금과 성격이 다르다' 는 논리도 펴고 있다. 거기에 덧붙여 야당은 계좌추적 등 정치적 탄압에 악용될 소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형 비리 사건이 터질 때마다 중심엔 으레 정치권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돌아보면 정치권의 설명은 설득력이 약하다. 외국의 경우 마약 범죄조직 등이 돈세탁의 주요 고객일지 모르나, 우리 사회에선 비자금.로비 자금 등 기업에서 정치권으로 흘러들어가는 정치자금이 돈세탁 범죄의 주종을 이뤄왔다.

정경유착에 의한 검은 정치자금 유통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한 주범으로서 우리에겐 고질적인 '중대 범죄' 다. 정치자금을 투명화해 불법 정치자금의 유통 경로를 차단하는 작업이야말로 '부패 공화국' 의 오명을 씻는 첫째 과업이다. 그런데도 정치권이 법 제정의 취지를 변질시켜 가면서까지 불법 정치자금 루트를 그대로 유지시키려는 것은 개혁에 역행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정치자금법 등 기존 법으로 충분히 규제할 수 있다는 주장도 현실과 거리감이 있다. 작금의 검찰 수사에서 의혹 투성이 정치자금들이 '대가성이 없다' 는 이유로 법망을 빠져나가고 있지 않은가. 불법 정치자금이 통용되는 한 기업의 분식회계는 존재할 수밖에 없고 정경유착 관행과 검은 돈에 대한 정치인들의 미련도 버릴 수 없다.

정치개혁만이 아니라 경제개혁과도 긴밀한 함수관계에 있다. 뜻있는 의원들이 고군분투한 대로 제대로 된 돈세탁방지법이 제정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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