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개헌논의로 힘 뺄 때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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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가장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목되었던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가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가상 후보들에게 뒤진 것으로 나타났다.차기 대선에 대한 예측이 불명확하게 되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팽팽한 운동경기처럼 정치도 끝까지 승자를 알 수 없어야 흥미롭다.국민의 한 표 한 표가 더욱 소중해지고 정치인도 뼈를 깎는 노력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4년 중임제 등 부작용 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정당당하게 경기규칙을 지키면서 경쟁이 이루어질 때에만 그렇다.반칙을 한다거나 심지어는 막판 뒤집기를 노려 경기규칙마저 바꾸려 든다면 국민이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요즘 정가에서는 4년 중임 정부통령제 개헌론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대선 구도를 바꾸기 위해 개헌론을 사용하는 것도 문제지만,미국정치전문가의 입장에서 볼 때 미국식 제도가 우리 실정에서도 좋은 제도인지는 의문이다.

이 제도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대략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중임제를 통해 조기 레임덕 현상을 막고,재선을 통해 책임정치를 구현할 수 있다.

둘째,부통령제의 장점을 살려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을 견제하고 대통령 유고시에 대비할 뿐 아니라,부통령후보를 대통령후보와는 다른 지역에서 충원함으로써 지역주의를 완화시킬 수 있다.

셋째,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주기를 일치시키면 여대야소의 정부가 탄생돼 정책의 효율성도 높이고,선거비용도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하지만 지금의 정치적 문제가 개헌으로 완화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소박한 희망사항일 뿐이다.실제로 헌법보다는 법률,시행령,운영규칙 등이 정치적 결과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개헌의 장점을 능가하는 부정적 측면도 적지 않다.첫째,단임 대통령은 재선에 연연하지 않고 역사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소신껏 정책을 집행할 수 있지만 중임제 하에서는 재선을 위해 인기 없는 정책은 피해간다.

미국 대통령이 당선 첫날부터 재선을 위한 선거운동을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게다가 재선에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에 첫 임기 중반부터 이미 레임덕이 시작된다.

정당의 목표는 집권이다.비록 현직대통령이 재선에 출마하지 않는다 해도 자당의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정책의 성공을 꾀할 것이므로 단임제하에서도 책임정치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의원 꿔주기,언론 길들이기,지역연합,검찰의 중립성 등이 문제되는 것은 모두 차기 대선과 관련된다.

만일 현직대통령이 재선에 출마한다면 닉슨의 워터게이트사건이 재발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시대가 바뀌었으므로 군사독재 시대에 만들어진 현재의 헌법이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우리의 민주화 수준을 너무 과대 평가한 결과다.

둘째,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시킬 것이라는 믿음도 환상에 불과하다.현 미국의 체니 부통령이 말해주듯 부통령 선택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다.대통령의 무소불위 권력은 부통령이 아닌,의회라는 제도를 통해 견제되어야 한다.실제로 부통령이 대통령을 견제한다고 했을 때,집권내부의 권력암투는 정정불안으로 이어질 것이다.

또한 부통령제는 지역주의를 완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심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국민적 공감대 형성해야

현재의 지역주의는 3김 이후 점차 완화되겠지만,부통령제가 채택된다면 부통령후보는 항상 지역주의가 강한 특정지역에서 독점하게 되어 명시적인 지역연합이 우리 선거의 일부가 될 것이다.그러면 현재 지역주의가 없는 다른 지역도 강한 지역성을 띠게 될 것이다.

셋째,선거비용을 줄이려면 개헌이 없이도 총선과 지방선거를 동시에 치르면 된다.

대통령이 40% 안팎의 득표로 당선되는 현 상황에서는 총선과 대선을 동시에 치른다 해도 여대야소가 만들어진다는 보장이 없다.

여소야대 상황에서도 여야가 타협과 상생의 정치를 해나가는 것을 훈련하는 것이 더욱 미래지향적이다.

지금은 개헌논의로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할 때가 아니다.경제 살리기에 힘을 모으고 갑작스런 통일에 대비하여 바람직한 권력구조에 대한 논의를 통해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 나갈 때이다.

趙己淑(이화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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