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1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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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16. 특혜는 안된다

김만제(金滿堤) 부총리는 김용산(金用山) 극동건설 회장이 자꾸 찾아와 "동서증권을 제일은행의 인수가에 넘겨 달라" 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국제상사 건설부문 인수에 대한 보상책으로 극동측에 골프장을 해 주기로 했는데 그게 잘 안 됐다고 말했다. 나는 신의 존중의 원칙에 따라 전임자의 약속은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재무장관으로서 재임중 하신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그런데 동서증권 인수가에 대해서도 무슨 언질을 주셨습니까?"

"가격 문제는 제일은행과 협의하라고 했어요. "

"알겠습니다. 값은 저한테 맡겨 주십시오. "

당시 극동의 동서증권 인수와 관련한 루머들을 수집한 보고서가 입수됐다.

제일은행이 극동건설.일해재단 등에 동서증권을 싸게 넘기기 위해 고의로 자산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유상증자분에 대한 실권을 추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제일은행이 동서증권 인수에 대한 증권업계의 반발로 동서의 운영권을 포기했고, 정부는 2백억원의 프리미엄을 붙여 동서를 극동건설에 넘기는 대신 극동측에 정치자금을 요구했다는 설도 실려 있었다.

그 무렵 극동건설의 주가가 급등한 것을 둘러싸고 현역 모 장군이 극동건설을 통해 동서증권을 인수하기 위해 극동의 주식을 연일 대량으로 사들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타이핑돼 있었다.

1986년 8월께 제일은행장과 은행 실무자들, 극동의 김회장과 회사 실무자들, 재무부와 은행감독원의 실무자들이 모여 두어 차례 회의를 했다.

제일은행장은 상장 유가증권의 매매는 증시의 시세를 기준으로 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김회장은 동서증권의 인수는 부실화된 국제상사 건설부문 인수에 대한 보상의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제일은행의 취득가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나는 제일은행 인수 후 주식 시세가 올라간 만큼 실거래 가격으로 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김회장을 설득했다.

시장에서 시가가 형성돼 있는 주식을 정부가 그보다 싸게 넘기라고 은행에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극동측이 시가에 매입하기로 두 당사자간에 합의가 이루어 졌다.

그 해 9월께 극동건설은 제일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동서증권 주식의 일부와 다른 금융기관들이 조금씩 갖고 있던 동서의 주식을 증시를 통해 시세대로 사들였다. 그 후 극동의 김회장이 다시 내 방에 들렀다.

"대단하십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나중에 골프나 한 번 치십시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게 그와의 마지막 상면이었다.

이렇게 해서 제일은행은 극동건설에 동서증권을 넘겨 주었다. 이 때 넘긴 지분은 경영권 확보에 필요한 최소량의 두 배가 넘는 물량이었다. 후에 제일은행장에게 물어 보니 "하도 시세가 좋아 더 팔았다" 고 말했다.

"그 덕에 우리 은행 결산 문제를 해결했어요. 감사합니다."

그는 "아무도 못하는 일을 해 줬다" 며 거듭 고맙다고 했다.

이 일로 나는 당국자의 도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무리한 얘기를 꺼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기업인들이 무리한 요구를 하더라도 공무원들이 각자 자신의 본분을 다하면 이를 차단할 수 있다.

이듬해 5월 부총리 취임식 때 내가 경제정책 당국자의 도덕성을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나는 기업인을 면담할 때면 차관.차관보.주무국장들 가운데 한두 사람을 배석시켰다. 그리고 반드시 면담록을 작성토록 했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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