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1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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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11. 80년대 부실기업 정리

1986년 1월 나는 재무장관으로 입각했다. 그 해 봄 어느 날 부실기업 처리 대책을 들고 대통령 결재를 받으러 청와대에 올라갔다.

사공일(司空壹) 경제수석(현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을 따라 집무실에 들어서니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다른 때처럼 만년필부터 꺼내 들었다.

"각하, 사인하지 마십시오. "

전대통령이 앉은 자리에서 안경 너머로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봤다.

"사인할 사안이 못 됩니다. 보고는 다 드리겠지만, 제 책임하에 처리하겠습니다. "

당시 나는 부실기업 '청소' 를 내 손에서 끝내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전대통령은 만년필을 도로 집어 넣었다.

그 뒤로도 그는 부실기업 정리에 관해서는 설명만 듣고 전권을 내게 맡겼다.

나는 대통령이 부실 정리에 앞장서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이 관여하면 정치 스캔들로 비화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차관 등 결재 라인에 있었던 간부들에게도 나는 "사인을 하지 말라" 고 지시했다.

전도 유망한 후배들이 나중에 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나로서는 배려였다.

당시 5백개에 가까웠던 정리 대상 기업들 중 굵직한 회사 78개를 정부가 나서 직접 처리했지만 결재 서류엔 그래서 나의 사인밖에 없다.

부실기업 정리는 하느라고 해도 훗날 말썽이 나게 돼 있다.

정권이 바뀌고 나면 당사자인 부실기업주들이 회사를 되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부실기업 정리에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나중에 좋은 소리를 못 듣게 돼 있다.

국제그룹 해체와 관련해 피소 당한 나의 전임자 김만제(金滿堤) 한나라당 의원(당시 재무장관)도 훗날 "나는 억울하다" 고 털어놓은 일이 있다.

부실 정리가 잘못되면 먼저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 주무장관과 주거래은행장이다.

누구도 기업을 망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재무장관 시절 한 번은 전대통령이 "당신 왜 이렇게 시끄러워" 하고 내게 물었다.

부실기업 정리를 둘러싸고 말들이 많을 때였다.

나는 "부실기업주는 잘 봐 달라고 돈 싸들고 오고, 안 되면 힘 있는 사람 동원해 압력 넣고, 그래도 안 되면 중상모략을 하게 돼 있다" 고 답했다.

그러자 전대통령이 "당신 말 맞아" 하고 맞장구를 쳤다.

얼마 후 청와대에서 회식이 있었다.

전대통령이 맨 먼저 내게 잔을 건넸다.

"정장관, 중상모략 많이 받았지? 내 알아. "

그 얼마 후 나는 경제부총리 발령을 받았다.

83년 7월부터 88년 2월까지 내가 외환은행장.은행감독원장.재무장관.부총리로 재직한 약 5년 동안 가장 중요한 경제현안 중 하나가 바로 부실기업 정리였다.

이 5년 동안 나는 10원짜리 하나 누구에게 준 일도, 받은 일도 없다.

돈을 받았다면 아마 부실기업 정리를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문제가 된 부실기업들은 대부분 기업주가 내게 돈을 싸들고 왔던 회사들이다.

그 때 신변 관리를 철저히 하지 않았다면 결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80년대 부실기업 정리 문제는 대법원을 거쳐 93년 문민정부 시절 헌법재판소로 넘어갔고, 사법당국은 결국 나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 과정에서 검찰이 나에 대해 뒷 조사를 했지만 잡아넣지는 못 했다.

부실 정리의 파장에서 벗어나는 데 무려 10년이 걸린 셈이다.

그 동안 정권이 두 번 바뀌었다.

어떤 땐 기적 같다는 생각도 든다.

부실기업 정리란 그런 것이다.

파장이 가라앉는 데 10년이 걸리지만 제대로만 하면 또 한 10년 부실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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