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역사 뭉개는 마구잡이 도시 재개발 이젠 그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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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서울 광화문광장 옆 교보빌딩 뒤편에 있던 피맛골은 ‘피맛길’이란 홍살문만 덩그러니 남긴 채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해장국 골목·낙지골목 등 서민의 애환과 정취를 간직했던 이 자리엔 초현대식 고층 빌딩이 들어섰고, 추가 개발이 한창이다. 조선시대부터 ‘종로 대로에 고관대작들이 행차할 때 탄 말(馬)을 피해(避) 다니던 백성들의 길’이 ‘도시환경정비사업’이란 개발 논리에 밀려 한순간에 자취를 감춘 것이다. 문화적 가치를 무시한 싹쓸이식 재개발이 낳은 결과다.

프랑스 파리에 매년 수천만 명의 전 세계 관광객이 찾아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이유는 고스란히 간직한 수백 년의 역사에 있다. 위압적이지 않은 낮고 오래된 건물, 포근하게 감싸는 골목길, 그 속에 스며든 역사적 스토리와 민중들의 삶의 흔적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魔力)을 발산한다. 서울도 파리에 못지않은 유구한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는 도시다. 600년이 넘은 수도(首都)에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동네와 골목길에는 저마다의 내력과 사연이 담겨 있다. 하지만 ‘도시 개발’ ‘현대화’라는 명분 아래 서울은 성냥갑만 잔뜩 들어찬 무색무취의 회색 도시로 변해 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서울시가 그제 발표한 ‘소단위 맞춤형 재개발’ 계획은 반가운 소식이다. 기존의 전면 철거 방식 대신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살리기 위해 필요한 지역만 골라 최소한으로 철거하겠다는 취지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기존의 전면 재개발 방식은 용산 참사에서 보듯 심각한 사회 갈등을 촉발하고, 삶의 터전을 깡그리 없애버리는 등 부작용이 컸다. 낡고 누추하더라도 보존 여부를 평가한 뒤 리모델링하거나 일부를 개조해 부가가치를 높인다면 역사성도 살리고 지역 주민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경남 통영의 동파랑 마을은 판잣집 달동네를 벽화작업을 통해 관광명소로 끌어올린 좋은 사례로 남고 있다.

도시의 건물과 길, 골목은 우리 역사와 문화 자산의 일부분이다. 그동안 우리는 마구잡이 개발주의에 매달려 역사 지우기에 급급했다. 사람 냄새가 나는 도시 재개발이 서울뿐 아니라 전국으로 확산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