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자선냄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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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또다시 거리에 종소리가 쩔렁인다. 매년 이맘때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구세군 자선냄비의 종소리. 들뜨기 쉬운 계절 잠시나마 불우한 이웃을 생각케 하는 이 종소리는 언제 들어도 정겹다. 아니 거룩하다.

하나님의 음성이 있다면 바로 이런 소리가 아닐까. 1891년 12월 어느날 1천여 빈민들의 식사를 고민하던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구세군 사관 조셉 맥피 정위는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다. 오클랜드 부두의 다리에 큰 솥을 내건 그는 그 위에 "이 국솥을 끓게 합시다" 라고 써 붙였다. 얼마 되지 않아 빈민들에게 따뜻한 식사를 제공할 만한 기금이 모였다. 구세군 자선냄비는 이렇게 시작됐다.

구세군은 이에 앞서 1865년 영국의 윌리엄 부스 목사가 창립했다. 산업혁명의 여파로 실업자와 빈민이 우글거리던 당시 런던의 슬럼가에서 이들 소외계층을 구제하기 위한 선교운동을 시작한 것이 효시다.

1878년 '구세군(The Salvation Army)' 이란 이름을 정식 채택한 이들은 이후 준군대 조직을 갖추고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여오고 있다.

창립 당시 이들의 슬로건은 '3S' 로, 국물(Soup).비누(Soap).구원(Salvation)이란 영어 단어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문자 그대로 가난한 이들에게 따뜻한 국물을 주어 굶주림을 해소하고, 비누를 주어 몸을 청결케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주어 구원을 얻게 하자는 운동이었다.

우리나라에는 1908년 구세군이 전파돼 1910년 첫 영문(교회)인 제일영(현 서대문 영문)이 서울 당주동에 문을 열었다.

현재는 2백10여개의 영문과 11만여명의 병사(교인)가 있으며 30여개의 사회사업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자선냄비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28년 12월 15일이다.

당시 한국 구세군 사령관이던 박준섭(조셉 바)사관이 서울에 자선냄비를 내걸고 불우이웃 돕기를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올 구세군 자선냄비 시종식이 4일 열려 성탄 전야인 24일까지 모금을 계속한다. 경제상황이 나빠지면서 올해 모금 목표를 지난해보다 낮췄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올해도 '얼굴 없는 천사' 의 미담은 계속될 것이다. 자선냄비 옆에서 의뭉스럽게 목탁을 두드리며 탁발한 뒤 모르는 척 자선냄비에 넣고 가는 멋쟁이 스님도 다시 나타날 것이다.

출출한 퇴근길 자선냄비에 슬쩍 몇푼 넣고 한잔 하러 가보자. 세상이 다 훈훈해진다.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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