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한반도 유사시 초기대응 빈틈 없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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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로버트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이 3일 미 하원 군사청문회에서 위험한 발언을 했다. 그는 “미군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개입돼 있기 때문에 (한반도 유사시) 그곳(남한)에 신속하게 도달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상군 투입 지연에 따른 공백은 “해군과 공군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미가 북한의 도발로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를 상정해 만든 ‘작전계획 5027’에 따르면 미국은 개전 2개월 내에 69만 명의 지상군을 한반도에 투입하게 돼 있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계획대로 증파하기가 어렵다고 미 국방장관이 공개적으로 밝힌 셈이다. 당분간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더라도 초기에는 제대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뜻이니 자칫 북한의 오판을 불러올 수도 있는 위험한 발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의 발언이 특히 주목되는 것은 최근 북한의 혼란스러운 정세 때문이다. 화폐개혁에 따른 주민들의 불만과 동요가 심상치 않은 가운데 군과 당을 중심으로 엇갈리는 신호들이 잇따르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과 후계 문제로 권력 내부의 지휘와 통제 체계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이런 터에 미군이 이라크에서 철수하는 내년 말까지 향후 2년 정도가 기습 남침의 호기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빌미를 미국이 북한 측에 제공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별일 아니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게이츠 장관의 발언에 대해 국방부 대변인은 “지상군 투입이 지연되는 상황이 있더라도 미군은 해·공군을 포함해 충분한 대응력을 갖추고 있다는 뜻으로 한 발언으로 본다”느니 “육군이 조금 늦게 오면 그만큼 해·공군력을 보강하면 문제 될 게 없다”느니 하며 진화에만 급급한 모습이다. 과연 그렇게 안심해도 좋은 상황인가.

잘 알려진 대로 북한은 병력의 70%를 휴전선 부근에 집중 배치하고, 군사분계선을 따라 8000여 문의 장사정포를 배치하는 등 대남전의 초점을 기습전에 맞추고 있다. 미 증원군의 도착이 늦어질 경우에도 북한의 기습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 군은 갖추고 있는가. 더구나 2012년 4월이면 전시작전권이 한국으로 넘어오지만 우리 군이 주도하는 한·미 연합작전계획은 아직 완성되지도 않았다. 북한의 급변사태에 대비한 ‘개념계획 5029’를 작전계획으로 구체화하는 작업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전시작전권이 전환되면 미군은 언제든 한반도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게 된다. 게다가 국방 개혁은 예산 부족으로 지지부진한 상태다. 이래저래 안보 공백 우려가 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안보의 기본은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는 것이다. ‘희망적 기대’는 금물이다. 정부는 한반도 유사시 대비 태세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어야 한다. 철저한 한·미 공조가 그 기본임은 말할 것도 없다. 공조에 문제가 없다면 게이츠 장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