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길 산책] 미꾸라지 잡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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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예전같으면 입동 지나 닷새면 물이 얼고, 열흘이 지나면 땅도 얼게 마련인데 동짓달을 코앞에 두고서야 설추위나마 느껴지니 도무지 철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다.

그저 출퇴근길에 차창으로 스치는 가로수의 조락(凋落)정도를 보아가며 나름대로 가늠해 볼뿐이다.

얼마전 동료들과 함께 강화를 거쳐 석모도를 다녀올 때만해도 회갈색 바닷물에 저물어가던 가을이 때늦은 손돌풍(孫乭風)의 심술에 서둘러 자리를 내주느라 눈물까지 뿌려대 처량하기 짝이 없다.

아마 지금쯤 석모도에도 물이 비치는 곳마다 여기저기 살얼음이 잡혔을 테다.

요즘이야 딱히 철을 가려 농한기랄 것도 없이 사철 분주하지만 70년대만 해도 대충 이때쯤이면 소울음이 게을러지고 농사꾼의 등줄기도 꼿꼿하게 힘이 들어가게 마련이었다.

가을걷이 된고개를 넘긴 까닭이다. 그러니 빈 들판만 바라봐도 들어찬 곳간 생각에 절로 웃음을 흘리는 우리네 순박한 인심에 어디 가만있었겠는가, 동네 농사지기들과 어울려 막걸리잔이라도 기울여야지. 그러다보면 여름철 물꼬싸움으로 쌓였던 앙금도 눈녹듯 스러지고….

이때 빼놓을 수없는 안주거리가 추어탕. '우공도강탕(牛公渡江湯)' 도 일년에 한두번 구경할까말까하던 시절, 촌에서 농사짓느라 빠진 기력을 채우는데는 이만한 것이 없었다.

본시 미꾸라지란 놈이 땅을 헤집고 다니는 힘이 장사인데다 물있는 곳은 어디건 우글대니, 하늘이 내린 보약이 이 아니던가.

지금처럼 농약과 금비로 반죽을 해대지않아 논게도 흔하던 시절이라 논물떼기를 하면서 군데군데 조그만 웅덩이를 파놓으면 얼마나 많은 미꾸라지들이 몰려드는지…. 특히 사시장철 물이 질척대는 골논에 놈들이 좋아하는 쇠똥과 메밀대를 우겨넣기라도 할라치면 그야말로 '진흙 반, 미꾸라지 반' 이었다.

오죽했으면 미꾸라지를 뜻하는 한자에 가을이 들어가 있을까마는 역시 미꾸라지는 가을이 깊을수록 제맛이 나는 법. 여름내 산꼭대기서 살던 굴뚝새가 사람냄새를 찾아 집근처를 기웃거리면 살어름이 어는데, 이때가 바로 추어탕의 궁합계절이다.

동면을 하는 놈이라 몸안에 겨울양식으로 한껏 준비했을 그 영양가며 맛을 더이상 따져 무엇하랴. 거죽이 반쯤 언 논바닥을 쇠스랑으로 찍어내면 겨울잠에 막 취한듯 굼뜨게 꼬무락거리는 미꾸라지들이 수두룩 쏟아져나와 손이 시렵거나 말거나 움켜내기에 바빴고, 먹성이 급한 조무라기들은 몇마리씩 슬쩍해 몸녹이기로 지펴놓은 모닥불에 구워삼키느라 검댕먹은 쥐주둥이가 되곤했다.

장정 서넛이 너댓사발 캐기는 식은 죽 먹기라, 살이 오를대로 올라 배가 누렇게 통통해진 놈들을 토장국물에 우거지.토란대와 함께 넣고 한솥 끓여내면 걸죽하니 구수던 그 맛이라니. 또 뭉근한 불에 얹어 서서히 두부속으로 파고들게 한 뒤 그대로 익혀 베어먹는 약두부 맛은 어떻고. 추렴술에 취하고, 맛에 취하고, 인심에 취하던 추렵(鰍獵)이 아련하다.

이만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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