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퇴장의 미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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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금 우리 사회는 총체적 위기라고 말한다. '공전(空前)의 대위기' 라고 말하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도덕적 위기에 놓여 있고 이념적 위기에 처해 있고 국가 관리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미래는 너무 불투명하고 하루하루 맞는 상황은 너무 절박하다.

정치는 사사건건 뒤엉키고, 경제는 마냥 곤두박질 치고, 사회는 기강이 해이할 대로 해이하다.

수일 전 우리 사회 내 지도층급에 속하는 인사들 30여명이 모여(태평로 모임) 모두 기본을 다시 세우고 다시 다지고 다시 지키는 '지도층의 길' 을 선언했다.

그 많은 시민단체들이 있음에도 왜 하필이면 이런 단체를 이렇다 할 위치에 있는 지도층 인사들이 새삼스레 모여 만들었을까. 이런 상태로는 우리 사회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와해의 상태로는 앞으로 10년이 못가 우리의 아이덴티티가 완전히 무너져 없어져 버린다고 생각한데 있다.

국가는 정치.경제에 앞서 도덕적 공동체다. 도덕이 지금처럼 무너지고 있다는 것은 국가가 무너지고 사회가 붕괴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는 또한 이념적 공동체다. 이념은 국가와 사회가 나아가는 목표며 방향타다. 우리 사회의 이념은 자유민주주의다. 자유민주주의는 지금까지 인류가 찾아낸 최선의 이념이며 제도다. 이 이념이 지금 통일이라는 명분으로 인식적 대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국가는 또한 관리기구다. 국가는 많은 이익집단들이 노정하는 상반된 이해관계를 제도적 장치 안에서 조절하며 국민적 화합을 창출해가는 갈등.통합의 관리기구다.

이 관리기구가 20년 전의 권위주의와 관치주의를 되살리고 되키워 신권위주의와 신관치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결과는 미디어를 통해 조석으로 듣고 보는 비리며 부패며 도산이다. 우리 내부의 분열이며 갈등이며 혼란이다.

이 심각한 사태를 우리 관리기구는 인식하지도, 대처하지도 못하는 인식불능.속수무책의 상태에 있다.

이유는 명백하다.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 제몫을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은 부지런하고 성취동기가 세계 어느 나라 국민보다 충만해 있다.

그런 국민에 지도층에 속한 사람들이 편승해 무임승차하는 데 오늘날 우리의 총체적 위기가 있다. 지금 우리 지도층 인사들은 다른 누구를 탓할 자격도 겨를도 없다. 오직 나부터, 나를 엄하게 책하고 다스려서 명실공히 지도층 몫을 다하지 않으면 안된다.

고금을 막론하고 지도층이면 반드시 지향해 가야 할 길이 있다. 무엇보다 도덕지향이다. 지도층은 일반적으로 고위직층이며 고소득층이며 명망가라 통칭 불리는 고평판가(高評判家)층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해서 자동적으로 지도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도덕성이 있을 때만 지도층이 된다. 지도층은 그 사회의 도덕적 지표다. 마음가짐이나 행동거지의 본보기가 되는 사람들이다. 지도층이 이 도덕적 지표로서 기능하지 못할 때, 그들은 세상을 가장 어둡게 하고 혼돈스럽게 하는 기생층이 된다.

둘째로 희생지향이다. 지도층은 그 사회에서 가장 혜택을 많이 받는 수혜(受惠)층이다. 이 수혜층은 국민에게 반드시 은혜를 갚고 혜택을 되돌려 줘야 하는 시혜(施惠)층이 돼야 한다.

이른바 희생과 봉사에서 가장 모범이 되는 계층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정반대가 돼 있다. 병역과 납세에서 여실히 증명되듯 희생은 고사하고 의무도 수행하려 하지 않는다. 나라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제일 먼저 이득을 챙기는 사람들이 우리 지도층이다.

셋째로 후진양성 지향이다. 끊임없이 인재를 발굴하고 양성할 의무가 지도층에 있다. 기존 지도층을 대신하거나 계승해 새로운 비전을 가진 지도층을 형성하도록 후진을 기르고 지원하고, 그리고 미련없이 퇴장하는 지도층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지도층은 자기 자식을 위해선 온갖 희생을 감내하면서도 후진을 위해선 조그마한 열정도 쏟지 않는다.

열정은커녕 자리에 너무 연연해 후진의 길을 가로막고 있다. 등장만 있고 퇴장의 미학(美學)이 없다.

이런 지도층이 존재하는 한 지난 10년이 '잃어버린 10년' 이 되듯 앞으로 10년 또한 '잃어버리는 10년' 이 된다.

태평로모임이 진정한 지도층의 모임이 되려면 도덕과 희생 퇴장의 미학을 다른 사람 아닌 나부터 보여야 한다.

송복 <연세대 교수. 정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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