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세계 제패한 한국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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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32강전
[제5보 (74~95)]
黑.최철한 9단 白.하네 나오키 9단

힘이 없으면 서럽다. 제아무리 뛰어난 이론과 천하를 굽어보는 대세관을 지녔다 할지라도 힘에서 밀리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힘이란 여러 가지 요소의 종합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생사(生死)를 이해하는 데서 싹튼다고 한다. 바둑판 361로에서 삶과 죽음은 거의 언제나 한 수 차이로 결정되는데 힘이 강하면 죽음마저 삶으로 뒤집을 수 있다.

물론 삶보다 나은 죽음을 이해하고 돌을 버릴 수 있는 능력, 즉 대세관도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피아가 구분되지 않는 먼지 자욱한 결전장에선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 한국바둑은 바로 이 같은 잡초의 힘으로 세계를 제패했다.

흑백의 돌이 엉키면서 생사의 분간이 어렵더니 74부터 윤곽이 드러난다. 귀의 흑은 79로 살았고 우변 백도 80으로 안전해졌다. 장대같이 뻗은 중앙 흑은 아직 미생이다.

그러나 이 흑을 돌보기 전에 최철한9단은 81로 육박한다. 상변 백의 생사를 추궁하며 먼저 집을 벌어들인다.

82의 공격이 두렵지 않은가. 그렇다. 힘이 없으면 이 한 수에 흑은 지리멸렬의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그런데 최철한은 83으로 이마에 딱 붙이는 한 수를 준비해두고 있었다. 굉장한 완력이다. 하네9단은 84부터 주춤주춤 물러선다. 우변에서 당한 아픔이 뼛속에 사무쳐 한시바삐 보복하고 싶지만 83의 힘을 당할 길이 없다.

84로는 '참고도'백1로 젖히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그러나 흑은 2로 껴붙여 역습해올지 모른다. 이 전형적인 한국류에 대응책이 마땅히 보이지 않는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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