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前職의 소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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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일본 정계의 원로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82)전 총리가 최근 '21세기 일본의 국가전략' 이라는 저서를 냈다.

본인 스스로 내용에 흡족했던 듯 "앞으로 일본 총리가 되려는 이들에게 교과서 역할을 할 것" 이라고 자랑해 화제였다.

한마디로 '지난 20세기를 반성.점검하고 21세기에의 구상을 가다듬어 보자' 는 책이다.

그는 책 서문에서 '국제정세는 급변하는데 일본의 정당들은 정권획득 또는 정권강화를 위한 다수파 공작(工作)에 여념이 없고, 정부는 정부대로 중앙부처 대개편을 맞아 당분간 국책(國策)을 형성하고 추진하는 데는 소홀할 것 같다. 21세기 초입에 벌어질 세계의 획기적인 구조변혁.문명전환에 대처할 기본자세가 돼 있지 않다' 는 '우려' 가 집필 동기였다고 털어놓았다.

나카소네는 전후 세번째로 장수한 총리다. 저서에도 오랜 정치경험에서 우러난 비전이 외교.안보.경제.교육.과학기술에 걸쳐 녹아 있다.

예를 들면 일본은 무모했던 태평양전쟁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며 '외교 4원칙' 을 제시했다.

첫째, 자기 국력 이상의 일을 벌여서는 안된다. 둘째, 외교를 도박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셋째, 내정(內政)과 외교를 혼동해선 안된다. 마지막으로, 세계사의 정통적 조류를 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요즘 민주당 서영훈(徐英勳)대표가 전직대통령들을 인사차 찾아다니고 있다. 최규하(崔圭夏)전 대통령의 자택을 방문했을 때는 45년 된 선풍기를 쓸 정도로 검소한 생활자세에 감동했다고 한다.

그제 전두환(全斗煥)전 대통령과 만나서는 "국회가 싸움만 하는 것은 내가 대통령 할 때나 똑같다" 는 뼈있는 핀잔을 들었다.

내일 노태우(盧泰愚)전 대통령을 찾아 무슨 말을 나눌지 모르겠지만, 속된 말로 '영양가 있는' 충고를 과연 들을 수 있을까. 그나마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은 방문을 거부했다고 한다.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은 재임시절은 신통치 않았지만 퇴임 후 남북 정상회담을 중재했고 집지어주기(해비태트)운동도 활발히 펼쳐 '처음부터 전직이었으면 좋을 뻔했다' 는 칭찬(?)까지 들어가며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라 있다.

칩거하다시피 수신(修身)에만 힘쓰거나 '너희도 별 수 없구나' 는 발언이나 해서는 '전직' 과 걸맞지 않는다.

왜 한국의 전직대통령들은 '21세기 국가진로' 에 관해 무게있는 저서나 주장을 내놓지 못할까.

노재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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