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정상회담 한달] 上. 평화정착 '모델' 만들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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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남북 정상회담은 분단 반세기 만에 남과 북의 정상이 직접 나서 지펴낸 평화와 통일의 소중한 불씨였다.

남북한은 정상간의 합의사항인 '6.15 공동선언' 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한 달을 맞아 그동안의 추진과정과 현재의 진행상황, 그리고 향후전망 등을 짚어 본다.

남북의 최고지도자가 정상회담을 가진지 한달을 맞는 지금 낙관론과 복잡한 현실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회담 당시 들뜬 감정과 흥분보다 냉철한 머리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그동안 서울과 평양에선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 상대에 대한 비방중상을 끝내기로 하고 실천에 옮겼다. 진지한 당국대화를 가질 수 있는 초보적인 분위기는 마련된 셈이다.

이달 안에 당국회담이 열린다거나 8.15를 맞아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진다는 시간표가 정상회담 이후의 순항을 예고해주고 있다.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면회소 설치도 타결될 전망이다.

남북경협이나 다각적 교류.협력의 확대가 대결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공존.공영의 전환기를 가져오리라는 낙관론이 그 어느 때보다 설득력을 갖는다.

현대그룹의 대북 경협사업이 확대일로에 있고 삼성그룹 경협단의 방북도 예정돼 있는 등 업계의 발걸음이 빠르다.

경의선(京義線)복선화.전력지원 등 몇몇 프로젝트가 거론되는 가운데 대북 사회간접자본(SOC)건설 지원은 눈앞의 현실이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사회적 파장도 작지 않았다.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화려한 TV데뷔는 그 자체로 일대 충격이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젊은층의 대북 이미지가 우호적으로 나타났고 일각에서는 '김정일 패션' 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북한도 정상회담 기록영화를 통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을 공식 인정하는 자세로 탈바꿈했다. 남북이 상대측 지도자를 인정한 것 자체가 중대한 변화라면 변화다.

정부는 곧 열릴 당국간 대화에서 남북 기본합의서(92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 경제.군사 등 분야별로 당국대화를 세분화해 나간다는 구상이다.

만약 내년 봄 이전에 金위원장의 서울 답방이 이뤄지면 남북한은 본격적인 관계개선의 급류를 탈 것이다. 이는 사실상의 '평화정착 과정 돌입' 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낙관론만 있는 건 아니다. 경협자금 마련과 구체적인 평화정착 프로그램 등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지 걱정 어린 얘기도 들린다.

그래서 정부당국은 기본합의서 실천을 위한 대응방안 준비는 물론 장애물 돌파의 방법론까지 마련해야 한다는 주문도 있다.

또 장기수 송환에 합의하면서 정작 납북어민.국군포로 송환은 뒷전으로 밀린 데 대한 아쉬움도 남아 있다.

한편 정부가 정책형성 과정에서 의견차이를 충분히 고려하는 원숙함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와 관련, 북한이 야당지도자와 특정 언론사를 공공연히 비난하는 것도 가볍게 볼 일은 아닌 듯싶다.

우리 사회의 이념적 지형이 남북관계에 투영되면서 복잡한 상황을 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국가보안법 개폐 논의와 북한 노동당 규약 개정문제가 얽혀 있어 그 해법이 단순치 않다.

6.15 공동선언에 나타난 '자주' 문맥과 통일방안도 논의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주한미군의 위상을 둘러싼 관심이 고조될 것이고 한.미간의 입장조율이 중대 관심사로 떠오를 전망이다.

연합이냐, 연방이냐를 둘러싼 논의나 체제논란은 차치하고라도 지금이 과연 통일방안 논의에 집중할 시기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일각에서 제기하기도 한다.

민족문제의 당사자 해결 원칙에 접근한 남북한이 주변 4강과의 관계를 어떻게 재정립하는가 하는 문제도 만만치 않은 과제다.

복잡한 문제를 많이 남겨두고 있지만 민족 성원 모두 남북한 당국의 실천에 기대를 걸고 있다. 이제 남은 일은 화해.협력과 평화정착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유영구 북한문제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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