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8면

티베트어로 만들어진 최초의 장편영화 '컵' 은 '만국 공통어' 가 되다시피한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다. 그러나 유니폼을 입고 잔디가 반듯하게 깔린 스타디움에서 벌이는 세련된 스포츠 영화가 아니다.

중국 정부의 탄압을 피해 인도로 망명한 티베트 불교의 스님들. 그 탈속한 스님들의 세계로까지 파고든 축구열기, 특히 1998년 프랑스 월드컵 기간 중에 일어난 에피소드를 통해 성(聖)과 속(俗), 전통과 현대, 젊은 세대와 나이 든 세대가 어떻게 마찰하며 또 갈등을 해소해 가는 지를 보여주는 유쾌하면서도 삶의 원형에 닿아있는 꽤 철학적인 영화다.

이를 테면 브라질과 프랑스의 결승전을 두고 벌이는 두 스님의 대화는 영화 '컵' 이 가진 유머의 한 단면이다.

(노승)언제 전쟁이 난다고?(주지승)전쟁이라뇨?(노승)두 나라가 공을 가지고 싸운다며?(주지승)아 예, 아마 자정쯤 시작할 겁니다.

(노승)싸우기엔 정말 이상한 시간이군. 근데 싸워서 이기면 뭘 얻는가? (주지승)컵을 차지하게 되죠. (노승)(컵에 뜨거운 차를 부으며)음, 컵이라.

브라질 출신의 축구 스타 호나우두의 유니폼을 본 딴 셔츠를 법복 밑에 받쳐입고 밤마다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 담을 뛰어넘는 열네살 먹은 수도승 오기엔. 그의 열정에 두 손 든 주지승은 사원에서 TV를 보도록 허락한다.

하지만 동료들로부터 쌈지 돈을 끌어모아도 모자라자 막 티베트에서 온 소년을 꾀어 어머니의 시계를 저당잡히게 한다.

이윽고 고대하던 결승전을 TV로 보게 된 오기엔. 그러나 소년이 어머니의 시계를 되찾지 못할까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보곤 TV에 눈을 고정시킬 수가 없다. 밖으로 뛰쳐나온 그는 소년의 시계를 되찾아 줄 방도에 골몰한다.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를 연상시키는 이 마지막 장면은 어떤 경전이나 법어보다도 깊이있는 감동으로 다가온다.

직업 배우가 아닌 실제 스님들을 기용하고 실화를 근거로 제작한 '컵' 의 감독 키엔츠 노부(38)는 티베트 불교를 연구하는 환생한 라마라고 한다.

"영화는 종교와 유사한 점이 있어요. 영화는 환영(幻影)의 과정이기때문에 우리에게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힘이 있지요" .

이영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