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이회창 총재의 책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이회창(李會昌)한나라당 총재가 동료.당원들과 함께 이번 선거결과를 반기고 자축하는 시간은 빨리 끝낼수록 바람직하다.

국민은 분명 한나라당에 더 많은 지지를 보냈지만 표밭을 들여다보면 한나라당에도 준엄한 경고 메시지가 적지 않게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제1당을 확고히 했다는 외형적 승리에 들떠 다수 의석을 다음 대통령선거를 위한 발판쯤으로 취급한다면 李총재뿐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도 큰 불행이다.

우리가 보기에 유권자는 집권세력이 권력을 오.남용하지 못하게 견제하면서 정책을 바로 펴도록 채찍질하라고 한나라당에 표를 주었지, 사사건건 집권당의 발목만 잡으라고 지지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만일 李총재가 대선을 염두에 둔 정국주도권에 집착해 강공(强攻)일변도로 나간다면 국회는 여야간 충돌과 감정싸움으로 바람 잘 날이 없을 것이다. 그런 광경은 지난 15대 국회에서 물리도록 보아 왔다. 제1당의 위상에 걸맞게 이번 국회를 모범적인 민생국회.정책국회로 이끌어주기 바란다.

그런 점에서 李총재가 어제 회견에서 '상생(相生)과 협력의 정치' 를 언급한 것은 시의적절하고 환영할 만하다. 그는 또 여야 총재회담에 대해 "필요하다면 만날 것" 이라고 말했다.

당장 6월에 남북 정상회담이 있다. 민족과 국가명운이 달린 중대사다. 여야가 따로일 수 없다. 이 문제에 초당적인 협조체제도 구축할 겸 양당 총재가 조건없이 만날 필요가 있다.

이왕이면 李총재 쪽에서 앞장서 만나자고 제의하는 게 바람직하다. 선거기간 중의 앙금을 여야 총재가 털어내고 국정과 현안 문제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여야 국민도 안심할 수 있다.

예컨대 16대 국회의 원(院)구성 문제 등에서부터 티격태격한다면 비난과 혐오가 제1당 총재에게 집중될 것이다. 작은 승리에 도취해선 결코 안된다.

이번 선거로 李총재에게는 국정에 대한 현명한 견제.협력의 책임과 함께 지역감정 해소라는 무거운 짐도 함께 지워졌다고 본다. 한나라당이 호남에서 턱없이 낮은 지지율에 그쳤고 영남지역 의석을 싹쓸이한 것은 누가 보더라도 심했다.

더구나 영남 유권자 상당수는 李총재가 예뻐서가 아니라 이른바 '반(反)DJ 정서' 때문에 한나라당을 찍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다. 李총재는 여당 못지 않은 문제의식과 자괴감을 갖고 지역주의 해소를 위한 대책을 모색해야 한다.

양당이 수십개 지역구에서 오차범위 내의 혼전을 벌인 것은 그만큼 유권자들이 여당의 안정론과 야당의 견제론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음을 의미한다. 얼마든지 제1, 제2당이 뒤집힐 수도 있었다. 우리는 李총재가 이런 민심을 겸허하게 헤아리고 생산적인 정국운영에 열린 마음으로 앞장 서길 권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