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병욱칼럼] 북풍-병풍, 흉보며 배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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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87년 11월 29일 대한항공 707여객기가 미얀마 국경 부근에서 추락했다. 북한공작원의 테러에 의한 폭파였다.

당시 마유미로 보도된 폭파범 김현희는 12월 15일 전격적으로 바레인에서 서울로 압송됐다. 바로 다음날 치러진 대통령선거는 집권 민정당 노태우(盧泰愚)후보의 여유있는 승리로 막을 내렸다.

92년 12월 14대 대선을 앞두고 중부지역당 간첩단사건, 속칭 이선실 간첩사건이 돌출했다. 그에 따른 대북 강경기류 속에서 18일 있은 대선에서 집권 민자당의 김영삼(金泳三)후보는 압승을 거뒀다.

96년 4월 4일 북한은 관영방송을 통해 비무장지대 불인정을 선언했다. 이어 5일부터 7일까지 사흘간 1백10~3백명씩의 무장병력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북측에 투입해 임시진지 구축작업을 벌였다. 나흘 후의 4.11총선에서 집권 신한국당은 선전했고, 국민회의는 예상을 훨씬 밑도는 의석 확보에 그쳤다.

선거를 앞둔 시기에 북한의 도발행동은 번번이 당시 집권당에 유리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97년 대선 때도 여당과 안기부가 북한의 도발을 유도하려 획책했다는 것이 바로 현정부 출범 직후 큰 파문을 일으켰던 '북풍(北風)공작' 이다.

당시 야당, 현 여당이 15대 대선에서 평화적 정권교체에 성공한 데는 DJP연합, 이인제 요소, IMF사태, 북풍 유도 봉쇄 등 여러 요인이 있다. 그러나 이회창(李會昌)후보 아들의 병역면제 의혹을 효과적으로 제기, 활용한 것도 중요한 승리요인 중의 하나였다.

지난날 여당이 북풍으로 큰 덕을 봤다면 지금의 여당은 상대당 후보 아들의 병역면제 시비로 재미를 본 셈이다. 한번 재미를 보면 그 맛을 못 잊는 게 병인데 지난 정권이 북풍에 연연했듯이 현 정권은 병풍(兵風)에 연연하는 것 같다.

물론 병역비리는 철저히 파헤쳐 끝까지 책임을 물어야 할 사안이다. 특히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 고귀한 신분에는 의무가 따른다)' 라고 본인과 가족의 병역비리는 지도층으로서는 결격사유다.

그러나 문제는 병역비리수사의 시기다. 병역비리가 새로 발생한 사건이라면 수사에 선거 전후를 따질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렇지만 이미 오래 전 일을, 더구나 1년여 전에 수사했던 사건을 덮어두었다가 시민단체가 청와대에 진정을 했다고 해서 선거를 코앞에 두고 검찰이 다시 본격 수사에 나선 데는 필시 곡절이 있을 것이다. 검찰이 아무리 정치적 고려를 부인해도 그것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이렇게 병역비리수사가 정치쟁점이 되다 보니 지탄의 대상이 돼야 할 병역비리 혐의자가 오히려 정치적 탄압을 받는 양 동정의 대상으로 둔갑하는 어이없는 상황마저 벌어지고 있다. 오죽하면 평소 병역비리 척결 같은 일에 앞장서 온 시민단체들마저 총선까지 수사유보를 요구하고 나섰겠는가.

흉보며 배운다더니, 북풍으로 재미 본 당시 여당이 또 그 덕을 보려고 북풍공작까지 했다고 흉보던 현 여당은 이젠 병역시비 덕을 총선에서도 또 다시 보려는 건 아닐까. 또 선거때만 되면 장관들이 지방을 휩쓸고 다니며 선심공약.여당 지원을 한다고 비난하던 측이 집권을 해도 장관들의 지방나들이.여당 편들기 시비는 여전히 가라앉지 않고 있다.

흉보며 배우는 건 현 야당도 마찬가지다. 집권시절에는 야당이 대안은 없이 반대를 위한 극한 반대만 한다고 욕하더니 자기네가 야당이 되고는 한 술 더 뜨는 것 같다.

이 시기에 대통령 하야론(下野論)이 왜 나오는가. 집권측을 비판하는 건 야당의 책무지만 자극적이고 무분별한 반대와 독설은 무책임하고 한심한 세력이란 나쁜 이미지만 심화시킬 뿐이다.

지금의 선거판은 국민들에게는 혐오감을, 정당 상호간에는 증오심만 키우고 있다. 현재의 판세론 어느 당도 과반 의석을 확보하긴 어려워 보인다. 선거 후 정당간 협의와 협력이 불가피해질 상황이 다. 그런데 다시는 보지도 않을 것처럼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해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성병욱 <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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