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볼쇼이 극장을 돕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유네스코는 2000년 3월 27일을 '볼쇼이 극장과의 국제 연대의 날' 로 선포하고 세계의 모든 극장.영화관.음악당, 그밖의 문화 기관들이 그날의 입장권 수입 일부를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 보수기금으로 할애해 줄 것을 호소하고 나섰다.

수입의 일부를 내놓기 어려우면 3월 27일 하루 극장이나 비디오 가게, 나아가 일반 백화점 문 앞에도 볼쇼이 돕기 모금함을 설치해 뜻 있는 사람들이 쉽게 기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올해 창립 2백24주년을 맞는 러시아의, 아니 세계의 대극장(볼쇼이는 크다는 형용사)은 제때에 필요한 보수공사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는 '임시극장 건축을 포함하는 '대대적 개축과 보수 공사를 하지 않'고는 세계에서 으뜸 가는 극장으로서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을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진 지 한참 됐'졌다.

그러나 최소 2억달러로 예상되는 공사비를 러시아 스스로 마련할 길이 없어 임시극장 공사는 중단된 실정이며 공연은 건물이 매우 헐었고 심히 낙후된 장비만을 가지고 있는 본 극장에서 계속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에 따라 유네스코가 지난해 5월에 볼쇼이 돕기 국제 캠페인을 시작한 것이다.

볼쇼이의 명성은 높지만 우리나라 사람으로 볼쇼이 극장에 가 볼 기회가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 극장들도 돈이 없어 허덕이는데 외국의 극장을 도울 여유가 있느냐, 외국에 도움을 주려면 모잠비크의 수재민 등 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야지 남의 나라 극장 보수 공사에까지 우리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느냐 등 볼쇼이 돕기 운동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는 여러 가지 이론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볼쇼이의 혜택을 직접 본 사람들은 그 극장에 자주 드나들거나 또는 적어도 볼쇼이 발레나 오페라단의 해외공연에 참여해 볼 기회가 있는 사람들이고 그들 대다수는 러시아인들이다.

그리고 볼쇼이는 러시아의 자랑이요, 상징이다. 그러나 볼쇼이 극장이 있음으로써파생하는 효과는 결코 그 극장에 직접 드나드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역경과 수난을 겪으면서도 높은 예술적 가치를 창조하고 첨단 수준을 유지해 나가는 볼쇼이 같은 극장들의 모범과 영감이 있기 때문에 세계 전체의 공연예술은 계속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연예술에 관계가 있는 모든 기관의 동참을 호소하는 이번 유네스코 주관의 볼쇼이 돕기 국제 모금운동은 최상의 발레와 오페라를 전세계에 선물해온 러시아인들의 문화적 노력에 대한 세계의 화답이기도 하다.

문화국 대열에 우리도 당당하게 참여하게 되는 것이고 볼쇼이를 위한 모금함에 평범한 시민이 돈을 넣는 모습은 러시아인들에게 우리가 외환위기를 맞았을 때 너도 나도 금을 내놓던 모습만큼이나 인상적으로 비칠 것이다.

그러나 이번 모금운동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면 하고 내가 바라는 더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심한 불균형을 보이고 있는 우리의 가치관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우리는 세계 전체의 기준에 비춰 볼 때 너무도 잘 먹고 잘 입는 나라가 됐다. 그러나 정서적으로는 너무도 여유 없이 살고 있는 국민이기도 하다. 아마도 정신적으로 하도 여유가 없기 때문에 고급 음식이나 물건에 대한 의존도가 그리도 높은 것인지 모른다.

유명 상표 옷을 비싸게 사 입고, 고급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 자꾸 찌는 살을 빼기 위해 또 써야 하는 돈의 아주 적은 부분이라도 음악이나 예술, 또는 자선 쪽에 돌린다면 삶이 얼마나 더 풍요롭고 멋질까.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사람도 오백원.천원만 볼쇼이 극장 돕기 모금함에 넣고 나면 세상을 보는 눈이나 자기 자신에 대해 느끼는 자부심의 농도가 달라질 것을 의심치 않는다.

볼쇼이 또는 다른 극장에 가게 될 때 언젠가 나 또는 내 어버이가 그 극장을 위해 촌지를 베풀었다는 것이 생각난다면 공연의 아름다움은 기부한 돈의 몇 배 기쁨으로 다가올 것이다.

눈에 띄는 비싼 물건을 갖는 기쁨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부나 자선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과 긍지가 어떤 것인가를 깨닫게 하는 방편으로 볼쇼이극장 돕기 운동의 활성화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인호<한국국제교류재단이사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