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문 장편소설 '달은 도둑놈이다' 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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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살아남은 자의 슬픔' 의 작가 박일문(41)씨는 단아한 체구, 맑은 얼굴이지만 속으로는 고민이나 슬픔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한 때 머리 깎고 불가에 입문하기도 했고, 지금도 서울시내 큰 절인 봉은사 자락에서 혼자 살고 있다.

그가 새로 내놓은 장편소설 '달은 도둑놈이다' (민음사.7천5백원)는 1992년 환속한 뒤 전업작가로 살며 고민해온 축적물이다.

'살아남은…' 은 그가 유신말기와 제5공화국 초기를 살며 고민해온 부끄러움과 슬픔의 얘기다. 그는 대학졸업 후 출판사를 운영하다가 이런 고민에서 벗어나려고 절에 들어갔는데, 그 곳에서도 견디지 못해 글로 풀어썼고 결국 이 작품을 들고 세속으로 돌아왔다.

반면 '달은…' 은 그 이후의 고민, 즉 '작가란 무엇이고, 소설이란 무엇인가' 라는 화두에서 출발했다.

달이 도둑인 까닭은 해로부터 빛을 훔쳤기 때문이다. 박씨는 마찬가지로 '작가도 도둑' 이라고 주장했다. 작가들 역시 과거의 문학이나 역사로부터 훔쳐온 것들로 얘기를 꾸려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소설은 문학에 대한 회의와 비판으로 가득하다.

"인문학의 위기라고들 하는데, 사실 문학은 그 중에서도 가장 가파른 벼랑의 끝에 몰려있는 셈이죠. 그렇다고 문학이나 인문학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문학의 위기를 작가의 죽음이라는 상징으로 보여주고, 또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

이런 거창한 주제를 잡았기에 소설은 '재미없을 것' 이 뻔했다. 작가는 '재미없어 아무도 안 읽으면 의미가 없다' 고 판단, 재미있는 소재와 구조를 생각해냈다.

바로 연애와 불륜얘기다. 주인공인 소설가 '나' 는 작가 자신이다. 30대 중반으로 인생의 반환점에 선, 힘빠진 마라톤 주자의 고독.공허감.무력감에 묻혀 산다. 별거 중인 아내는 성실한 생활인이자 유능한 출판인이다. 그런 아내의 성실과 유능함이 주인공을 더 상실감 속으로 내몬다.

주인공이 찾은 일탈의 대상은 컴퓨터통신으로 알게된 제주도 여자. 일상을 탈출한 주인공은 여자의 초대를 받아 제주도로 날아간다. 새로운 삶과 창작에 대한 의욕을 되찾지만 작가는 당초 계획대로 주인공을 죽인다. 제주도 여자를 새로운 작가로 탄생시키기 위해서다.

박씨는 지금도 문학을 제대로 하기위해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지난해 연세대 철학과에 편입학했다. 그는 문학과 철학이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작가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가볍게 포장해도 여전히 무겁다.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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