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난징대학살과 일본의 우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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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937년 여름 루거우차오(蘆溝橋)사건으로 중일전쟁의 단초를 연 일본군은 파죽의 기세로 톈진(天津).베이징(北京)등을 거쳐 11월 상하이(上海)를 점령했다.

그들의 다음 공격목표는 장제스(蔣介石)국민당정부가 수도로 삼고 있던 난징(南京)이었다.

9만명의 일본군이 양쯔(揚子)강 남안의 이 도시를 3면으로 포위해 들어가자 총통 장제스는 성 함락 5일 전 정부를 이끌고 충칭(重慶)으로 퇴각했다.

잔류해 있던 약 70만명의 난징 시민과 군인들은 12월 13일 새벽 성벽을 타고 넘어온 일본군들을 앉아서 맞았다.

난징 점령 초기 6주일간 일본군은 무기력속에 빠진 중국군과 민간인들을 상대로 잔혹을 극한 살육행위를 저질렀다.

백기를 든 군 포로들은 물론이고 수천.수만명의 젊은이들을 총검술훈련 혹은 '목베기시합' 의 대상물로 삼아 무자비하게 희생시켰다.

어린 소녀, 노파 할 것 없이 여자들은 무차별로 강간한 뒤 살해해 버렸다.

사람을 산 채로 파묻고 배를 가르거나 사지를 자르는가 하면 연료를 쏟아부은 뒤 불태워 죽이기도 했다.

한 생존자는 훗날 "마치 하늘에서 비 아닌 피가 쏟아져 내린 듯했다" 고 끔찍했던 참살현장을 되새기고 있다.

이렇게 희생된 사람이 당시 난징 잔류인구의 절반 가까운 약 30만명에 이르렀다.

미국 새너제이머큐리지는 "사망자들이 손을 잡으면 난징~항저우(杭州)의 3백22㎞를 이을 수 있고 흘린 피의 양은 1천2백t, 시체는 기차 2천5백량을 가득 채울 수 있을 것" 이란 추정치를 싣기도 했다.

전쟁의 한가운데서 야만과 잔혹성의 극치를 보였던 일본은 그러나 전후 그런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뿐만 아니라 난징 대학살 자체를 부인하고자 했다.

지금 도쿄도지사로 있는 작가 이시하라(石原愼太郞)가 "일본이 난징에서 대학살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는 중국인들이 꾸며낸 거짓말" 이라고 한 건 그런 태도를 대표하는 예다.

최근 일본의 우익단체들이 오사카(大阪)에서 대대적인 집회를 열고 "난징 대학살은 20세기 최대의 거짓말" 이라며 사실 자체를 아예 부인하고 나서 내외로 큰 파문이 일고 있다.

그들은 "증거가 없지 않으냐" 고 큰소리로 되묻고 있지만 이건 과거를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이시하라의 신념과 인식을 다시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우익들의 이런 강변은 향후 일본이 나라를 들고 디뎌갈 위험한 행보를 예고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요즈음은 군사대국화를 겨냥한 일본 우익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판이다.

중국과 일본 당사국끼리 따질 일이라고 해서 우리가 손을 놓은 채 바라만 보고 있을 계제는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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