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갈길 먼 '노근리' 진상규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생존자들이 너무나도 큰 고통을 당해왔다는 사실을 압니다. " 11일 오후 2시 정부 중앙청사 10층 기자회견장.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조사를 위해 지난 9일 방한한 미국측 정부대책단 루이스 칼데라 육군성장관은 "진심으로 유감(sincere regrets)을 표한다" 며 회견을 시작했다.

그런 수사(修辭) 탓인지 기자회견장에 함께 참석한 우리측 대책단원들은 보상 및 진상규명과 관련해 진전된 입장표명이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분위기는 바로 바뀌었다. "지금까지 진상규명 노력을 했는데 미 정부의 공식입장은 뭔가" 라는 질문이 쏟아지자 칼데라 장관의 답변은 명확했다.

"모든 기록을 검토해야 합니다. 어느 부대의 누가 어떤 임무를 수행했는지에 대한 당시 작전기록은 물론 감찰기록까지가 조사대상입니다. 모두 1백만건이 넘는 방대한 기록입니다. "

그는 '기록이 방대하다' 는 말을 두 차례나 반복했다. 동시에 우리측 단원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쪽 구석에선 "1백만건을 언제 조사하는가" 라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지난 10월부터 활동에 들어간 우리 대책단이 보유하고 있는 자료집은 4백여쪽 분량의 '노근리사건 관련자료' 단 한권. 그나마 신문.잡지에 실린 기사를 모은 것이 대부분이다.

1백만건의 미국측에 비해 1차자료는 전무한 상태나 다름없다.

칼데라 장관의 발언이 이어졌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학살 그 자체보다 무고한 양민이 과연 계획적으로, 의도적으로 살해됐느냐는 점입니다. "

'계획적' 이냐, '의도적' 살해냐를 규명하자면 당시의 작전기록 등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지난 3개월간 현장조사와 피해주민들의 증언수집에 치중해온 우리 정부 활동만으론 역부족이란 의미다.

실제로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진상규명은 결국 미국 기록을 어느 정도 협조받느냐에 달려 있다" 고 토로했다. 노근리 사건의 진상추적과 보상 시기.규모 등이 미국 정부에 달려 있는 셈이다.

98년 한햇동안 공공기관에서 생산된 문서는 7백60만권. 그러나 정부기록보존소에 보관돼 있는 문서는 정부수립 후 지금까지 고작 44만8천여권. 합동 회견장을 떠나는 우리 대책단의 고위관계자는 축 처진 표정으로 "우리 기록이 없으니 미국의 조사계획을 따라 갈 수 밖에 없다" 고 말했다.

고정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