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 연극사의 산증인으로 제9회 비추미 여성 대상을 받은 원로 연극배우 백성희씨가 수상 소감을 밝히고 있다. [최승식 기자]
비추미 대상 선정 사유에 대해 주최 측은 “66년간 배우의 길을 걸어온 연극계의 개척자로, 현재까지도 국립극단 단원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백씨는 43년 극단 ‘현대극장’의 연극 ‘봉선화’ 주인공으로 데뷔한 뒤 지금껏 400여 편에 출연했다. 한국 근대연극사의 산증인이다. 게다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지난달 명동예술극장에서 ‘세자매’에 나왔고, 12월엔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둥둥 낙랑 둥’을 공연한다. 지난해엔 ‘백년언약’의 주인공을 맡아 한번의 등·퇴장도 없이 2시간 내내 무대를 지켰다. 국립극단 권혜미 프로듀서는 “존중해 드려야 하는 원로배우가 아닌, 누구보다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해낼 수 있는 현역배우”라고 말했다.
그 나이에 어떻게 대사를 달달 외울까. 백씨는 “그냥 습관”이라며 “덕분에 치매 걸릴 걱정 안 한다”고 했다. 피부는 고왔고, 자세는 꼿꼿했으며, 계단도 성큼성큼 걸어다녔다. “체력 관리 꾸준히 하시나 봐요”했더니 “그런 거 잘 모른다”고 했다.
백씨는 대개 새벽 2시 넘어 잠이 들고, 술도 즐긴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대에 설 수 있는 비결은 “주책없이 살기 때문”이라고 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나 같은 늙은 노인네가 어떻게 젊은이들하고 같이 어울릴 수가 있겠어요. 배우니깐 가능하지. 같이 연습하고, 같이 무대에 서고, 끝나고 2차 가고 3차 가고…. 그 기(氣)를 받은 덕이지. 연극이 보약인 셈이에요.”
그는 늘 단아한 이미지다. 정작 당신은 그게 싫었다. “배우란 어떤 틀로 고정되는 순간, 죽게 마련”이라고 했다. 64년에 연기했던 연극 ‘만선’의 구포댁 역이 전환점이 됐다. “질박한 여인네와 내가 안 어울린다고 연출자가 안 주는 거에요. 속이 상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배우가 다쳐서 내가 대타로 나섰고, 보란 듯이 제1회 한국연극상(현 백상예술대상)을 받았죠.”
“나이를 알 수 없는 배우”도 그에게 따라다니는 말이다. 30대 중반에 ‘줄리어스 시저’에서 열한 살 소년을 연기했고, 50세를 넘겼을 때는 열아홉 살 공주를 소화해냈다. 지금은?
“새롭게 욕심이 나는 것보단, 예전에 했던 작품 중 ‘지금 하면 정말 잘 할 텐데’ 하는 게 있죠. 테네시 윌리엄스의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같은 거. 정말 엘리자베스 테일러(동명 영화에서 그 역할을 맡았다)가 입을 쏙 다물게 만들 자신이 있는데….”
최민우 기자
◆비추미 여성 대상=삼성생명공익재단이 여성의 사회적 역할 증진에 기여한 인사를 격려하기 위해 2001년 제정했다. 지금껏 주로 여성인권신장, 사회복지, 학술 관련 인사가 많이 수상했으며 배우로선 백씨가 처음이다. 변주선(69) 한국아동단체협의회장, 정광화(61) 충남대 분석과학기술대학원장도 올해 수상자로 선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