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차세대 수출 누가 담당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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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며칠 전 서울에서 영국의 이코노미스트 잡지사 주관으로 '재벌개혁논쟁' 이라는 회의가 개최됐다. 국내외 전문가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재벌의 지배구조에 관한 개혁을 주장했다. 1인 독재경영에 관하여는 미국에도 GE와 같은 성공사례가 있기는 하다. 민주적으로 사외이사제도를 도입했을 때 실효성의 문제점도 지적됐다.

항상 국내외 언론에서 과잉투자의 비난을 받아 온 섬유.철강.조선.가전.자동차.반도체.LCD는 우리 수출의 주종을 이뤄 왔다. 시장이 주기적 불황에 들어갈 때마다 대기업들이 정경유착을 통해 무모하게 과대 투자를 했기 때문에 그 부담이 국민에게 전가된다고 했다.

그래도 수출은 기존 대형 산업에 계속 의존해왔고 세계 시장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시장 점유율은 일본에 훨씬 못미치는 상황이다.

5대 재벌은 우리 총투자재원의 45%를 차지하고도 부가가치는 15% 정도 생산하고 있으며 고용도 10% 미만이기 때문에 우리의 전체 투자효율이 낮아 국제경쟁력이 약화됐다고 한다. 계열화된 협력업체군을 거느리는 모기업의 투자 재원을 분리해 효율을 측정할 수 있을까. 시장경쟁력이란 계열화된 협력사까지 포함한 총체적인 경쟁력이기에 의미가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사태 이전에 우리는 경쟁력을 걱정하면서 높은 금리, 높은 임금, 고평가된 원화환율, 정부 규제로 인한 과다한 기업비용 등이 우리 경쟁력 저해요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 임금.금리.환율.정부규제면에서 획기적인 개선이 이뤄진 현재, 경쟁력은 오히려 저하됐다. IMF체제에서 기업은 투자를 줄이고 수출을 늘린 결과 무역수지.경상수지가 획기적으로 개선됐다.

투자를 줄이기 위해 다음해에 팔 상품 개발을 소홀히하고 종합적품질관리(TQM)비용을 줄이면 자연히 경쟁력은 약화되게 마련이다. 총투자를 줄여 경상수지 흑자로 외채를 갚고나면 우리의 경쟁력은 저하되고 국민생활수준은 낙후된다.

북한 경제상황에서, 그리고 모라토리엄 이후 러시아 경제상황에서 너무 분명히 보여주는 사례다. 정보유통이 빨라지면서 거시경제지표는 순식간에 미시경제 상황으로 반영된다. 재벌구조조정에 있어 경쟁력을 위한 산업구조조정이 재무구조조정보다 우선해야 한다.

무한경쟁의 개방된 시장에서 이미 피를 흘리고 있는 대우 계열사를 향한 경쟁업체의 집요한 공격을 누가 막아낼 수 있는가. 선단경영을 해체하고 각자 독자적으로 운영할 때 투자재원은 어떻게 마련할 것이며 불황대책은 무엇인가. 경쟁업체는 다각화를 통해 막강한 자금력과 경영능력을 갖춘 세계기업들이다.

경쟁이 비교적 덜 치열한 오지의 후진시장을 공략한다는 대우의 세계경영에 대처할 전략은 무엇인가. 자금력.경영능력.기술력 모두가 비교우위의 핵심역량이 되지 못할 때 부지런하게 뛰기라도 해야 한다.

핵심역량은 이제부터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며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핵심역량은 기업주의 역량이 아니라 기업 전체의 역량이기 때문이다.

재벌기업 총수의 지배구조가 무너진다면 위험이 있더라도 막대한 투자로 모험을 하는 기업가 정신은 누구의 몫인가. 채권단의 채권조정이 끝난 후 아직은 신용을 만들지 못한 새 경영진이 금융시장에서 얼마 만큼 직접금융으로 투자재원을 조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현금흐름으로 기업의 생존을 판가름하는 시대의 경영자는 보수적인 자금운영을 할 수밖에 없다. 보수적인 경영으로 어떻게 기업경쟁력을 강화할 것인가. 대만의 중소기업 부도율은 우리보다 10배나 크다.

높은 부도율, 그리고 실패에 대한 사회의 따뜻한 배려가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도전으로 강력한 중소기업을 만든다.

정부가 시장의 심판관역할만 할 때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해야 하는 기업가들은 무슨 동기로 모험을 하는 것일까. 벤처기업이 우리의 부가가치 생산과 고용의 대부분을 담당할 수는 없다. 첨단 벤처기업은 장려돼야 하고 자유로운 시장경쟁을 통해 재산을 축적하는 우리의 빌 게이츠가 탄생해야 한다.

그러나 특성상 벤처기업의 수출을 통해 국가의 무역수지 균형을 맞춘다는 것은 아직도 시일이 많이 걸리는 일이다. 당장에 세계 반도체시장이 하향곡선을 그리고, 대만에 막대한 LCD시설이 완공될 때 우리는 주력 수출상품을 선정해 집중적인 노력을 하지 않으면 수출 둔화로 외채는 늘어나고 지불능력이 문제될 수도 있다.

국가 재정은 단기유동성도 문제지만 장기적인 경쟁력 강화도 더욱 중요한 문제다.

배순훈<한국과학기술원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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