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분석] 경제는 보수, 비경제는 진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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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여당이 경제.비경제 분야를 확연히 가르는 방식으로 국정 운영의 가닥을 잡았다.

열린우리당이 30일 내놓은 '경기 활성화 대책'에서는 이런 분리 의지가 읽힌다.

앞으로 경제 살리기 노력과 정치.사회 분야의 이른바 개혁 프로그램은 서로 다른 논리와 실천 구도로 끌고 가겠다는 것이다.

경제 문제의 해법은 한나라당이 줄기차게 요구했던 감세정책을 과감히 수용할 정도로 실용적.보수적인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반면 과거사 문제와 수도 이전 등 정치.사회 개혁은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고 밀고 나갈 태세다.

열린우리당은 '경제 위기'라든지, '경기 부양' 같은 말을 쓰지 않았다. 이런 인식과 해법에 제동을 걸었던 노무현 대통령을 다분히 의식한 듯하다. 그러나 경제를 살려보겠다고 내놓은 대책을 보면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하겠다는 자세다. 경제 문제만큼은 확실히 '실용 노선'을 걷겠다는 입장이다.

여당 의원들은 "지금 경제 상황이 도대체 어떤지 알고나 있느냐"는 지역구민들의 원성을 들어왔다. 특히 스스로 지지층이라 여기는 서민.중소기업이 겪고 있는 고통은 외환위기 때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판단이다.

"이런 판국에 무슨 과거사 규명이냐. 행정수도는 배불러진 다음에 옮겨도 되는 것 아니냐"는 소리가 나올 만도 하다. 청와대도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다.

정부.여당의 입장에선 이러다간 죽도 밥도 안 되겠다는 위기 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노 대통령은 "경제 문제를 핑계로 역사적인 사업들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이것으론 부족했다.

결국 경제 살리기와 개혁 추진이란 두 마리 토끼를 각각 따로 잡겠다는 구도로 가닥이 잡혔다.

이런 정국 운영 구도의 변화는 아파트 분양 원가 공개 문제를 둘러싼 논란에서도 이미 드러났다. 시민단체들의 목소리를 등에 업은 여당은 분양 원가 공개를 밀어붙일 태세였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시장원리가 지켜져야 한다며 원가 공개를 반대한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이헌재 부총리는 그 후 개혁을 표방하는 여권 실세들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규제 완화 등 경제 활성화 정책을 줄기차게 주장해 왔다.

이해찬 총리의 부임도 변화를 촉진했다. 이 총리는 규제 완화를 강조하면서 경제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욕을 보였다.

정부.여당의 달라진 모습은 노사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엿보인다. 정부는 개별 분규에 일절 개입하지 않으면서 타결을 끝까지 기다리는 인내심을 보여줬다. 김대환 노동부 장관은 불법 파업에 대한 엄중한 경고 메시지와 함께 일부 노조의 귀족화 경향을 비판하기도 했다.

여당의 핵심 386 의원 사이에서도 변화의 기류가 감지된다. 386 의원들이 중심인 의정연구센터는 최근 삼성경제연구소에 '한국경제 성장동력 10대 아이디어'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개혁과 별도로 경제는 경제대로 살리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길은 여전히 첩첩산중이다. 과연 경제 문제와 비경제적인 개혁 현안을 구분할 수 있겠느냐는 것부터 의문이다. 비경제 분야의 개혁 조치들은 각 경제 주체들의 심리와 의사결정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더구나 수도 이전 같은 개혁적 국정 과제는 경제와 직결된 문제다. 이를 따로 떼어 추진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김광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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