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승강기 타기 겁난다…관리부실 사고 급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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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난 8월 16일 밤 서울 방화동 K아파트. 귀가 중이던 회사원 한모(28.10층 거주)씨가 탄 승강기가 갑자기 흔들리더니 7~8층과 1층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기 시작했다.

돌연 멈췄다가 미끄러져 내리는 등 멋대로 움직이기를 수십차례. 승강기내 인터폰은 눌러도 응답이 없었고, 결국 한씨는 휴대폰으로 119구조대를 찾았다. 통신장애로 10여차례 시도 끝에 겨우 전화가 걸려 8층에서 구출되기까지 20여분간 그는 극도의 공포에 떨었다.

문제의 승강기는 불과 이틀 전 유지보수업체 H사의 월 정기점검에서 '이상없음' 판정을 받았다.

같은 달 29일 밤 서울 염창동 A아파트에선 열로 몸이 불덩이가 된 8세 소년이 엄마와 함께 병원에 가던 중 승강기에 갇혔다. 역시 119구조대에 구출되기까지 찜통속에서의 40여분. 두 사람은 탈진해 초주검이 돼버렸다.

승강기 사고가 최근 부쩍 늘고 있다. IMF 이후 무더기로 생겨난 유지보수업체들의 보수료 덤핑경쟁과 기술력 저하, 규제개혁 차원에서 이뤄진 승강기 부품에 대한 형식승인제 폐지(올 2월), 보수업체에 대한 관리기능 약화 등 부실을 부르는 요인들이 잇따라 겹친 때문이다.

"요즘의 관리 실상을 알면 아마 타기가 겁날 것이다. 고장 잦은 승강기는 더욱 그렇다. " 서울의 한 승강기 보수업체에서 기술자로 일하다 석달 전 퇴사한 K씨의 고백이다.

아파트건 사무실이건 밤낮없이 인명을 태우고 오르내리는 고층화 시대의 필수시설. 그러나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위험한 존재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올들어 8월말까지 119구조대가 출동한 승강기 사고는 2천63건. 하루 8.5건 꼴이다. 96년 2천2백22건, 97년 2천5백36건에서 지난해엔 2천9백76건으로 껑충 뛴 터다.

사고원인은 유지보수 부실이 57%, 보수작업자의 과실이 11%다(한국승강기안전관리원 집계). 68%가 관리 잘못으로 일어난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보수업계의 영세성과 난립 때문. 97년말까지 4백27개에 머물던 승강기 유지보수업체가 98년 이후 1백97개나 새로 생겨났다.

등록취소된 곳을 빼고 9월말 현재 5백37개. IMF 이후 회사가 망하거나 구조조정 등으로 실직한 관련기술자들이 마구 개업한 것이다.

이들 영세업체 중 상당수는 관리할 승강기 대수를 늘리기 위해 유지보수비를 대폭 낮춰 아파트단지나 사무용 건물 등에 뛰어든다. 대신 부품을 교체할 때 싸구려 제품을 정품으로 속여 바가지를 씌우거나 갈지도 않은 부품값 챙기기, 정기점검 횟수 줄이기 등으로 타산을 맞춰나간다.

"군소업체들은 평균 1백대의 승강기를 맡고 있다. 보수비가 대당 월 5만원꼴이니 한달 수입이 5백만원 정도다. 업체등록 최소요건인 기술자 5명의 인건비도 안되는 돈이다. 고장이 안날 수 없는 부실판이다. " 승강기안전관리원 관계자의 말이다.

거기에다 규제완화 차원에서 승강기 부품에 대한 형식승인제가 폐지되면서 저질 부품들이 마구 생산되거나 중국 등지에서 수입돼 사용된다.

9월 현재 전국의 승강기는 17만대. 자동차와 달리 고장이 나면 승객이 불가항력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부실 승강기들이 지금 곳곳에서 생명을 담보로 위태롭게 달리고 있다.

기획취재팀〓김석현.신동재.강갑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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