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세계화 창구 여는 규장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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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역사적으로 볼 때 고전의 정리와 국학의 발전은 한 국가의 정체성 확립과 관련된다.

17세기 청나라는 북방족으로서 무력으로 중국을 점령하고 '힘의 통치' 에 한계를 느끼자 중국 역대의 고전을 수집 정리해 사고전서 (四庫全書) 를 간행했다.

이런 국가적 문화사업을 통해 강남으로 피난.은거하거나 저항적인 한족 (漢族) 지식인들을 포섭하고 문화국가로 탈바꿈했다.

조선왕조 문물제도의 기초를 놓은 세종대왕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사업도 집현전을 통한 고전의 연구와 인재양성이었다.

조선 후기 문예부흥기라 불릴 정도로 문운 (文運) 이 크게 일어난 18세기 영.정조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영조대에는 조선 전기에 이뤄진 문물제도를 재정비했으니 '속대전' '속오례의' 등 '속 (續)' 자가 붙은 문헌들이 모두 이때 재정리된 것이다.

정조대에 이르면 규장각을 설립해 한편으로는 서적을 수집 간행해 고전 정리사업을 벌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재를 양성하면서 문화정책을 펴나갔다.

규장각은 내각과 외각으로 구성돼 있었던바, 내각을 창덕궁 안에 두어 왕의 문화정치를 보좌하게 하고 외각은 강화도에 두고 국립출판사격인 교서관을 여기 부속시켜 책을 출판했다.

또한 정조가 수집하기 시작한 중국본서적 6만여권이 남아 있는데, 당시 중국을 통해 고급정보를 입수하는 방법이 서적을 수입하는 것이었으므로 그 결과물이다.

19세기 조선이 사양길에 접어들자 규장각도 국가의 흥망성쇠와 부침 (浮沈) 을 같이 하면서 1910년 일제의 조선총독부로 넘어갔다가 광복 후 서울대로 이관됐다.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는 고도서 18만 책, 옛날 서류인 고문서 5만장, 책을 찍어내던 목판인 책판 1만8천판, 현판 76점 등 모두 26만여점이 보관돼 있다.

고도서에는 옛날 책 외에 지도.의궤 (儀軌 : 국가행사 기록과 그림) 등 시각자료도 포함된다.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가 국보로 지정돼 있다.

이들은 모두 조선왕조의 연대기들이니 조선이라는 나라가 문치 (文治) 를 지향하며 기록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웅변으로 말해준다.

그동안 학자들 사이에서는 규장각 자료의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국학연구의 기초자료로 활용됐지만 대중적인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규장각에서는 규장각 자료의 보존과 열람 편의 제공 등 기본적인 업무 외에 중요한 규장각 도서를 영인해 보급하고 목록과 해제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일반에 편의를 제공했다.

이런 작업이 기초가 돼 이번에 자료의 전산화를 시도하게 된 것이다.

이 데이터베이스 작업이 성공할 경우 국보급 규장각 자료는 원본의 모습을 보여주는 삼차원의 이미지 파일을 통해 원본의 겉장과 속내용은 물론, 돌려서 뒷면까지 볼 수 있도록 해 직접 원본을 보여줄 필요가 없게 함으로써 원본보존에 완벽을 기하게 된다.

특히 고지도나 의궤 등 시각자료의 데이터베이스화는 관련학문 분야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할 전망이다.

초서로 된 자료는 탈초 (脫草) 하고 방점을 찍는 작업까지 완료해 원문의 한글번역은 물론 영역 (英譯) 해 세계의 한국학 연구자들에게 제공하고 나아가 CD롬으로 제작해 고급 문화상품으로 개발하려는 것이다.

어느 학자는 규장각이야말로 DMZ (비무장지대) 의 생태보존실태와 함께 세계화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보물이라고 말했다.

가장 학구적이고 또한 미래지향적이며 세계를 향한 창구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규장각 자료의 전산화는 앞으로 우리 문화의 장기적인 발전에 기초가 될 것이다.

이는 18세기 르네상스 이후 실로 3백년만에 도래하는 21세기 문화의 세기를 준비하는 작업이다.

또한 일제의 압제와 냉전시대에 잃어버린 우리 민족의 정체성 찾기 움직임과 맞물려 의미심장하다.

19세기 말 서세동점 (西勢東漸) 하던 세계질서 재편기에 서양과학문명의 충격 속에 기존의 조선문화를 지키면서 우수한 서양기술을 수용하려던 지성계의 한 흐름인 동도서기론 (東道西器論) 이 드디어 결실을 보게 됐다고 생각한다.

동도 (東道) 의 정수인 규장각에 있는 국학자료를 서기 (西器) 로 규정할 수 있는 컴퓨터를 매개로 해 전산화함으로써 동도서기론이 실현되는 것으로 평가해도 좋을 듯싶다.

정옥자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규장각 관장

◇ 필자약력 ▶57세 ▶서울대 사학과 ▶서울대 문학박사 ▶저서 : '조선후기문화운동사' '정조시대의 사상과 문화'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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