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 경제위기 지나간 것일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올들어 우리 경제 상황이 지난해에 비해 상당히 호전됐다.

한때 바닥을 드러낼 뻔했던 정부의 외환금고에 이제는 5백억달러 이상이나 쌓였고 금리도 유사 이래 처음으로 한자릿수에 안착했다.

기업들은 그동안 생존을 위해 극단적인 비상경영체제를 유지해 왔으나 올 들어서는 생산활동을 정상수준으로 복귀시키고 있음이 분명해지고 있다.

소비자들도 연쇄부도 현상이 진정됐기 때문인지, 외국인 주식투자 자금이 대량 유입됨에 따라 주가가 급등해서인지, 그동안 미뤄왔던 내구재 구매를 본격화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가 지속된다면 올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당초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4% 이상으로 급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최단시일내 세계 어느 국가에 비해 성공적으로 경제 위기를 극복한 것일까. 불행히도 그 대답은 꼭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지난해 이후 추진해 온 IMF방식의 개혁은 곧 한계에 부닥칠 가능성이 오히려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의 현실을 한번 직시해 보자. 우선 올해 경제성장률의 반등은 총수요 (내수+순수출) 의 회복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재고의 급감 현상이 둔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기업들은 금리가 급등하고 신용이 경색되자 과다하게 생산을 감축한 대신 재고를 덜어내 기존 수요에 대응했다.

그 결과 국민소득계정상 재고는 국내총생산 (GDP) 의 7%에 해당하는 28조원이나 감축됐던 것이다.

그러나 올들어 경제활동이 정상 수준으로 복귀하고 재고수준이 바닥에 다다름에 따라 기업들은 생산증대를 통해 수요에 대응하고 있다.

만약 올 재고 감축이 예년 수준에 그치면 재고의 GDP성장률에 대한 기여도가 자동적으로 6.5%나 급등하게 될 것이다.

실로 수요회복 없는 성장률의 급등이란 IMF고금리 처방으로 인한 '통계의 착시현상' 이라 하겠다.

올해 총수요는 수출부진과 수입급등으로 지난해에 비해 오히려 2%정도 감소할 전망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생산증가율이 급등해도 실업률은 줄지 않고 늘어나고만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업 및 금융기관의 구조조정도 당초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점차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현재까지 40조원의 정부재정을 투입해 금융기관 부실채권을 매입했으나 금융기관의 무수익자산은 크게 줄어들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제2금융권은 아직도 국제결제은행 (BIS) 자산건전성 기준을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기관이 대부분이다.

기업의 부채조정도 '부채의 자본전환' 그리고 '자산매각' 이나 '증자' 속도를 감안할 때 연말까지 완결되기를 기대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지난 수십년에 걸쳐 체질화된 '투자주도형 한국경제' 가 급속히 붕괴될 것이고 우리 경제는 급격히 저성장의 함정에 빠지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IMF의 급격한 개혁요구는 그동안 외환부족 현상을 급반전시키는 데 상당히 기여했다고는 하나 체제개혁에 있어서는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한국의 개발경제 체제가 1년만에 '앵글로 - 색슨' 형의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한국인과 기업들이 미국인과 같이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을 것인가.

외국 사례를 보더라도 성공한 개혁은 장기간에 걸쳐 일관되게 추진해온 노력의 산물이지 일시적인 충격이나 강요의 결과가 아니었다.

지금이야말로 정부는 우리 산업의 장기적 경쟁력을 유지해 줄 수 있는 개혁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할 시점이다.

현재 해외에서는 '신자유주의 노선' 을 세계표준화 하려는 미국의 일방적인 압력에 대해 견제와 비판이 일고 있다.

이 기회를 활용해 세계가 납득할 수 있는 독자개혁안을 제시하고 이를 국민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성실히 실행한다면 우리의 국제적인 신용도는 IMF처방의 부작용에 시달릴 때보다 오히려 더 상승하게 될 것이다.

정문건 삼성경제연구소 상무이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