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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작품 웃는 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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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즐거운 고민이라는 말이 있다. 4개월 전쯤 나는 2004년 광주 비엔날레 주최 측으로부터 홍보대사를 제의받았다. 요즘은 홍보대사가 난무하는 시대다. 별의별 홍보대사가 많다. 그러나 미술 홍보대사는 좀 달랐다. 내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했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현대미술 애호가를 수십년간 자처해 온지라 홍보대사를 선뜻 받아들이면서 딱 한마디만 첨부해 봤다. 비엔날레 전시에 나를 참여작가로 포함시켜 준다면 혼신의 힘을 다해 더 열심히 홍보대사 역할을 수행해 낼 텐데, 바로 그것이었다. 생각해 보시라. 내 작품이 거기 걸렸는데 사람들한테 한번 구경와 보라는 얘기가 얼마나 술술 나오겠는가. 내 얘기가 통했는지 깜짝 놀랄 만한 응답이 왔다. 아예 메인작가로 초대된 것이다.

세계 몇몇 도시에서 비슷한 미술행사가 열리는데 규모면에선 단연 광주 비엔날레가 최고다. 광주시 전역의 전시공간이나 심지어는 지하철 공간에도 주변전시(프린지)가 펼쳐지기 때문에 수백명의 작가가 등장하게 된다. 나는 그중의 하나로 끼어 들어가는 걸 염두에 뒀는데, 메인작가로 지명된 건 실로 놀라 자빠질 일이었다. 본관 4층 건물 안에 전시초대될 경우 편의상 메인작가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가로.세로 9m의 널찍한 공간을 배정받은 날부터 무섭게 작업에 돌입했다.

비엔날레는 매우 독특하다. 일반 화랑 전시나 각종 아트페어(Art Fair)와 달리 그림을 사고파는 상업성이 배제되기 때문에 작가의 역량과 실력만 드러나게 최상으로 꾸며준다.

나는 졸지에 비엔날레 작가로 격상돼 맡은 바 임무대로 홍보에 열중했다(하기야 이 글도 비엔날레 홍보의 일환이다). 한편 평면회화만으로는 승부를 걸 수 없다, 입체로 나가야 한다, 설치를 해야 한다…. 길길이 설치며 지난 여름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일 이외의 시간은 몽땅 작품 제작에 몰두했다.

그런 와중에 지난주 어느 날 내 방송 매니저에게서 소위 스케줄이 들어왔다. 오는 9월 10일 모스크바 광장에서 KBS 열린음악회가 열리는데 거길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9월 10일 날짜가 맞느냐고 묻고 또 물었다. 왜냐하면 누가 믿겠는가, 바로 그날이 광주 비엔날레 대망의 개막 날짜였기 때문이다. 나는 또 물었다. 왜 하필 내가 모스크바에 가야만 하냐. 대답은 간단했다. 고르바초프나 옐친 앞에서 노래를 부른 특이한 경력의 가수여서 지명됐노라는 것이다. 웬만한 가수한테는 열린음악회가 꿈의 무대이기 때문에 이것조차 사실은 즐거운 고민의 극치다. 그러나 이번만은 다르다. 내 생애에 두번 다시 있을 미술잔치가 아님이 분명한데 광주를 비우고 모스크바로 갈 수는 없다.

이때쯤 매니저가 차분하게 물어왔다. 우리는 15년에 육박하는 친구 사이다. "이봐! 당신 돈을 어느 쪽에서 벌지? 미술 쪽인가, 음악 쪽인가." 아! 나는 허를 찔렸다. 지금까지 나로 하여금 생계를 잇도록 돈을 벌게 해준 건 단연 음악이었다. 내가 죽고 나면 그때야 그림 값이 오를까, 글쓰기나 그림에서 버는 돈은 새발의 피 정도였다.

그렇다면 얘기는 끝난 셈이다. 나는 모스크바에 가야 한다. 돈이 명예에 한판승을 거둔 것이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순서였고 방법이었다. 적어도 나한테는 말이다. 나는 즉시 광주 비엔날레 주최 측에 상황 설명을 했고, 그 대신 개막 이틀 전 9월 8일 개별적으로 작가와의 만남 및 작품 설명회를 따로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대망의 9월 10일 광주에 내려간 내 작품들은 주인도 없이 손님들 앞에서 뽐을 낼 것이고 같은 날 내 목소리는 역사의 현장 모스크바 상공에서 울려퍼질 것이다.

어느 노정치인이 석양을 붉게 물들이고 물러나겠다고 호언장담했다가 말없이 주저앉은 적이 있다. 별일 없는 한 이번 9월에는 나의 노을이 제법 붉을 것만 같다. 내 자랑이 너무 심했다.

조영남 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