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 부처 관련 정책 내봤자 퇴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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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국회예산정책처 L 분석관은 올 초 글로벌 금융위기로 국가 재정이 급속히 팽창하자 영·미(英·美) 재정감시 정책을 벤치마킹한 ‘경기부양자금의 독립적인 감시기구 설치’ 정책을 고안했다.

현직 공무원이 국민신문고 이용한 까닭은?
신문고에 제안해도 해당 공무원이 검토하니 효과 없어

L 분석관은 소속 부처의 보고 체계를 거쳤지만 “예산을 총괄하는 기획재정부가 자기 영역을 포기할 리 있느냐”는 핀잔만 들었다. 현직 공무원인 L 분석관은 결국 청와대 홈페이지에 링크된 국민신문고에 정책을 올렸다.

L 분석관은 한참을 기다려도 답변이 없자 청와대에 전화를 걸었다. 신문고는 국민권익위원회 관할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또 한참을 기다려 이 담당관의 답변을 듣고 그는 한동안 말을 못 이었다.

이 담당관은 “해당 정책은 기획재정부 소관이기 때문에 그쪽으로 이관했고 담당관이 검토 후 불필요한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감시대상으로 지적된 기획재정부 담당관이 자신의 업무를 독립된 기구로 넘기라는 정책을 검토했던 것.

L 분석관은 “조금이라도 다른 부처와 관련이 있는 정책을 알아서 국민신문고에 제안하는 현직 공무원이 많다”며 “신문고에 정책 제안을 해도 이를 해당부처로 넘겨 검토하게 하는 줄 알았다면 그렇게 오랜 시간을 투자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현직 공무원들이 국민신문고를 통해 정책을 제안하는 일이 늘고 있다.

본지가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신문고 운영기관인 국민권익위원회로부터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신문고에 정책 제안을 하는 직업군 중 현직 공무원은 지난해 6.9%에서 올해 1분기 8.7%로 크게 늘었다.

공무원들이 신문고를 이용하는 숫자가 증가한 것에 대해 국민권익위의 신문고를 운영하는 한 과장은 “제안자가 공무원이라고 했다고 해서 우리가 공무원이 맞는지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의미를 따지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김동욱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공무원이 국민신문고를 이용하는 경우가 늘어난 것 자체가 부처 간 소통 부재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행정안전부 내에 공무원들의 제안 시스템이 있어 공무원들이 자신의 직무와 관련해 국민신문고를 이용할 필요성은 없어 보인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결국 국민권익위가 운영의 묘를 잘 살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처 간 알력으로 좌초하거나 변질된 정책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지난해 민간 출신인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은 건강보험 가입자의 정보를 활용하는 정책을 관철시키려 전재희 보건복지가족부 장관과 설전을 벌였지만 결국 포기해야 했다.

산업은행 민영화 문제도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가 입장을 달리하면서 처음과는 다르게 변질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L 분석관의 아이디어가 이렇게 묻혀야 하는 하찮은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정치권 내에서도 이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김성식 한나라당 의원은 “재정확대와 조기집행으로 시중에 엄청난 돈이 풀리고 있지만 이를 감시하는 기능이 미흡해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의원이 간사를 맡고 있는 한나라당의 초선의원 모임 민본 21은 ▶예산집행 기관인 기획재정부 내의 시스템을 이용하는 방안 ▶별도의 예산감시 기관을 청와대 수석실 혹은 총리실 산하에 신설하는 방안 ▶국회에서 예산집행 감시 기능을 맡기 위해 감사청구 조건을 완화하는 방안 ▶감사원이 이러한 기능을 함께 수행하는 방안을 놓고 올 초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다.

최광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정부가 엄청난 돈을 풀었는데 어디에 썼는지를 감사해야 할 감사원이 오히려 조기 예산집행을 독려하는 난센스도 있었다”며 “경기부양자금 등 재정확대는 향후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어 반드시 사전 감시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정연 기자·jay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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