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 제조물책임법 때 이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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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제조물책임 (PL:Product Liability) 은 소비자가 제조물, 즉 자동차.가전제품.식품.의약품 등의 제조일로부터 10년 이내에 제품 자체의 결함으로 신체 또는 재산상 손해를 입었을 경우 제조업자가 피해 전액을 보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도 제조물책임법 제정을 두고 업계와 정부 및 소비자단체간의 의견조율이 쉽지 않을 듯하다.

문제는 제품 자체에 결함이 있는지, 없는지가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이 된다.

자동차 사고의 경우 차체 결함에 의해 발생할 가능성과 사용자의 잘못에 의한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이 경우 차체 결함에 대한 입증문제가 쟁점이 될 수 있다.

자동차 특성으로 보아 일반적으로 차체 결함보다는 사용자 잘못에 의해 사고가 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 점이 바로 자동차에 제조물책임법 (PL법) 을 적용하기가 모호한 점이다.

얼마 전 한 언론기관에서 법제정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필요하다' 는 비율이 높게 나온 것처럼 시장의 개방화 추세에서 원칙적으로 PL법 제정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선진국과 같이 법제정이 사회적 현상으로 일반화돼 있는지에 대한 입법시기상의 문제, 관리소홀로 인한 문제가 발생할 경우 결함과 하자의 구분을 어떻게 명확히 할 수 있을 것인지, 또 어느 선까지 책임을 부과할 것인지 등 유통구조상의 문제점에 대한 종합적이고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

PL법이 제정.시행될 경우 제조물책임을 묻는 소송이 현격히 증가할 것이라는 점은 선진국의 예로 볼 때 충분히 예견된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는 제조물의 결함에 대한 객관적인 판정기관 미비, 제조물 책임관련 소송에 대응할 수 있는 법조인력 절대부족, 제조물 책임보험 미실시 등 제도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갖춰져 있지 않은 상태다.

여기에 외환위기로 인해 국내 경제가 큰 어려움에 처해 있는 시점에서 제조물책임에 따른 각종 소송이 발생할 경우 가뜩이나 어려운 국내기업의 여건을 더욱 나쁘게 할 우려가 있다.

또한 중소부품 협력업체와의 제조물책임법 관련 계약 수정 등이 요구되며, 자본력이 약한 중소기업의 경우 제조물책임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파산하는 기업이 속출할 우려가 있다.

제조물책임 방어비용은 결국 제조물 생산비용의 증가로 이어져 국내경제 활성화에도 역행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사회적 여건이 성숙된 일본 등 선진국에서도 최소한 20년 이상의 준비기간과 검토기간을 거쳐 PL법을 도입한 것을 보더라도, 각종 여건이 미비된 현 상황에서 PL법을 도입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한다.

자동차 산업의 경우 한.미 통상협상 결과에 따라 제작사가 품질에 하자가 있을 때 리콜하는 '자가인증제도' 가 2003년 1월 1일에 도입될 예정이다.

PL법은 그 이후에 시행돼야 하고 또한 국가의 표준 또는 개별 법령에 의해 규정이 있는 제조물의 경우 면책권을 부여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어려운 경제여건 아래서 PL법의 제정.시행은 기업 (특히 중소기업)에 적지 않은 원가상승 압박과 인력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며, 제품개발 리스크에 대한 부담에 의해 신제품 개발 지연으로 국가경쟁력 상실의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따라서 국내 경제가 어느 정도 회복한 이후에 점진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정덕영 한국자동차공업협회 상근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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