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비정규직법, 고용 유연성 확대 원칙 살려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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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7월 비정규직법 시행 이후 정부가 우려했던 수준의 ‘해고대란’은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부가 전국 1만 개 표본 사업장을 대상으로 한 비정규직 실태조사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한 근로자가 절반을 넘어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초 노동부는 정규직 전환비율이 30% 정도일 것으로 예상했다. 또 8월 신규 실업급여 신청 인원은 6만9000명으로 7월(9만2000명)보다 오히려 줄어들었다. 비정규직법 기간 제한조항이 실시되면 매달 5만여 명씩의 실업자가 추가로 양산되리라는 노동부의 예측이 오판으로 드러난 것이다.

무엇보다 비정규직발(發) ‘실업대란’이 현실화되지 않은 것이 다행스럽다. 하지만 노동부는 비정규직법이 가져올 부작용을 과장되게 유포했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정확한 통계와 냉정한 분석을 생명으로 삼아야 할 정부 정책이 불과 두 달 만에 과대포장으로 드러난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노동부는 비정규직법 개정이란 목표에 사로잡혀 모든 정보를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가공하는 이른바 ‘정보의 정치화’에 빠졌던 것은 아닌지 자성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비정규직 실태조사 결과가 현실을 제대로 반영했는지는 의문스럽다. 지난 7월 중순 노동부 조사에선 정규직 전환비율이 평균 28%로 나왔다. 또 한국노동연구원이 조사한 1998년~2005년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비율은 12.8%였다. 여기에다 7월 이후 경제 환경이나 고용 사정이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느닷없이 정규직 전환 비율이 50%를 웃돈다니, 그 결과를 선뜻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실제로 비정규직법이 올 상반기 임시국회에서 연거푸 공전되면서 ‘언젠가 해결되겠지’하는 기대감에서 서로 애매한 상태로 고용을 지속해온 사용자나 비정규직이 적지 않다. 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무시한 채 기간 제한을 초과한 경우도 흔하다. 이 같은 이른바 ‘무늬만 정규직’이 양산돼 통계 부풀리기로 이어지지 않았는지 정밀하게 따져봐야 할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서는 정확한 현실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선 노동부는 비정규직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한 작업에 다시 착수해야 할 것이다. 야당과 노동단체들도 설익은 실태조사 결과에 맹목적으로 매달려 정치공세에 나선다면 자기 발등을 찍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과격 정규직 노조에 숱하게 데인 우리 기업들이 갑자기 정규직을 팡팡 늘리는 자선단체로 둔갑했다고 믿는 것인가.

비정규직 문제는 정규직 노조의 양보 없이는 근본적으로 해결되기 어렵다. 또 법률에 사용기간까지 경직되게 못박으면 결국 비정규직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된다. 노동부의 실업대란설(說)이 빗나갔다고 35만~50만 명(정규직 전환율 50%일 경우)이 타의로 쫓겨나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비정규직 보호와 함께 고용 유연성 확대라는 원칙도 살려내야 한다. 그런 균형점을 찾아야만 눈물짓는 비정규직 근로자를 최대한 줄일 수 있다. 비정규직 근로자를 진정으로 위한다면 여야와 정부는 원점에서 다시 비정규직법 협상에 나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