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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인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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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1980년대 초 시골 여중생이었던 나는 일기장에 허구한 날 한·일 고교야구 대회에 나갈 대표팀 명단을 적었다. 요즘 축구팬들이 인터넷에 대표팀 베스트 일레븐을 올리듯이 말이다. 군산상고 조계현, 경북고 문병권, 광주일고 문희수, 부산고 김종석 등은 요즘 아이돌 가수들처럼 소녀팬들을 거느렸다. 이들은 ‘초고교급 투수’라는 말로 불렸는데 이때 빼놓을 수 없는 선수가 청주 세광고의 송진우였다. 유난히 촌스러웠던 이 선수는 폭발적 인기는 없었다. 하지만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이 왼손 투수는 백업 투수가 유난히 약했던 세광고의 거의 모든 게임을 혼자 책임졌다. 피곤해 보여도 부상이 있어도 그는 쉬지 않았다. 내가 뽑은 대표팀 투수명단에서 송진우는 빠지지 않았다.

시골 소녀는 상경하여 야구기자가 됐다. 담당팀은 전성기의 이글스였다. 91년 한국시리즈 3차전, 7회까지 퍼펙트게임을 기록하던 송진우를 기억한다. 8회 손쉬운 파울플라이를 놓치고 볼넷으로 대기록이 깨지면서 아쉬워하던 그의 얼굴. 취재를 하다 보면 경기장에서 선수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도 있고 밥도 먹게 되지만 그는 농담 한마디 던지는 일도 없고, 사석에서 만나는 일도 없어 친해지지 않았다.

야구기자를 그만두고 야구와 담을 쌓은 것이 15년쯤 지났나. 우연히 TV 경기에서 그를 다시 보았다. ‘세상에…’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 촌스러웠던 왼손 투수는 아직까지 공을 쌩쌩 던지고 있었다. 시골소녀가 엄마가 되어 아이를 낳아 소년으로 키울 때까지. 내가 야구쯤은 까맣게 잊고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그 오랜 시간 동안 그는 쉬지 않고 공을 던져온 것이다. 까만 얼굴의 눈자위 아래에 내려앉은 두둑한 나잇살은 40대 중반의 스쳐간 세월을 짐작케 하지만, 그는 여전히 늘씬한 그 몸매 그대로였다.

40대쯤 되어 내가 생각한 ‘행복한 인생’의 정의는 ‘좋아하는 일이 있고, 그것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처지가 되지 못하거나,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하거나, 혹은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불행해진다.

송진우 같은 사람을 보면서 ‘행복한 인생’을 넘은 ‘위대한 인생’의 답안지를 보게 된다. 프로 생활만 21년, 공을 잡기 시작한 지 30년 넘게 꾸준히 한 길을 달리기. 비록 그는 소녀팬들의 우상도, 최고 투수의 화려함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대스타도 아니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정말로 오랫동안 쉬지 않고 했다. 그의 671경기 등판, 3003이닝 210승, 2048탈삼진은 불꽃놀이처럼 팍 터져 올랐던 기록이 아니라 차곡차곡 돌멩이를 쌓아 만들어진 거대한 산이다. 그의 기록을 깨려면 프로야구 최고의 선수 누구라도 한결같은 자신의 기록을 최소 5년, 10년쯤 유지해야 한다. 5년 뒤, 10년 뒤 그의 기록을 깨는 사람이 혹시 나올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때쯤 다시 그의 이름을 뒤돌아보며 그가 만들어간 전설의 의미를 깨달으리라.

그의 위대한 인생 비밀 중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의 대기록 뒤에는 프로야구 최다패 투수라는 불명예도 함께 있다는 점이다. 끝없는 패배에도 굴복하지 않고, 남들 은퇴할 무렵 은퇴의 유혹을 뿌리치고 체인지업을 배워 부활했다. 이 위대한 인생 앞에서 뭐 좀 더 나은 게 없나 싶어 여기저기 메뚜기처럼 옮겨 다녔던 스스로의 인생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이윤정 TV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