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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억류됐던 기자 2명, 꼭 ‘여기자’라고 써야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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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parkys@joongang.co.kr

사회의 각 분야에서 여성들의 활동이 왕성해지면서 여성에 관한 고정관념을 강조하거나 비하하는 성차별적 언어가 차츰 사라지는 추세다. 남성만을 나타내는 단어들은 양성평등 표현으로 바뀌고 있고 직업에 대해서도 성중립적인 단어가 등장하고 있다.

언어에서 ‘남성 지우기’는 국가적 차원으로도 전개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올 초 성차별적 언어의 사용을 중단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한국도 2년여 전 국립국어원에서 성차별적 표현이 들어간 5000여 가지 용례를 발표한 데 이어 정부와 여성단체도 꾸준한 계도 노력을 펼쳐 무분별한 사용이 줄고 있다. 그중에는 과연 성차별의 틀을 씌울 수 있느냐는 논란이 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일리 있는 지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언어습관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히 교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어서 일상에서 성차별적 언어가 뿌리 뽑히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개개의 표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언론마저 자신도 모르게 성차별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또 여성을 비하한다든지 선정적인 표현들은 많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기사의 본질과 관계없이 여성을 강조하는 등의 불필요한 사용이 자주 눈에 띈다. 예를 들면 얼마 전 북한에 억류됐다가 풀려난 2명의 미국 기자에 대해 국내 언론 대부분이 ‘여기자’란 말을 썼다. 이에 대해 독자 정희영씨는 “이들의 취재 활동 내용, 억류 경위 등은 여성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자로 표현한 것은 잘못된 게 아니냐”는 생각을 전해 왔다. 정씨는 여기자로 제목을 뽑은 미국이나 유럽 매체는 한 군데도 없었고 가부장적 문화가 뿌리 깊은 중국과 일본에서조차 여기자란 말을 잘 쓰지 않는다고 전하면서 직업인으로서 열의와 전문성이 있는 여성들을 더 이상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전문가로 대접하고, 우리나라가 양성이 평등한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달라고 주문했다.

직업에 성별 접두어를 붙이면 어떤 예외성을 부각시키게 된다. 여기자라면 기자이긴 한데, 남자가 아니어서 예외적 존재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여기자 말고도 여의사·여류작가·여조종사·여군·여판사 등 다른 전문직도 마찬가지다. ‘여’자 뒤에 오는 직업은 여성이 하기 힘든 일이라는 인식이 많다. 하지만 여성의 전문직 진출이 활발해지고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엔 사정이 달라진다. 더 이상 예외적인 존재가 아닌 것이다. 게다가 여성의 역할이 따로 있으며 힘들고 전문적인 일은 남성의 몫이라는 사회적 편견도 많이 없어졌다. 이럴 때 여기자·여의사 등은 여성을 부수적인 존재로 인식시키는 성차별적 표현이란 지적이 나올 수 있다.

신문에서 기사의 대상이 된 사람이 여성일 경우 ‘김모(52·여)씨’ 식으로 쓰는 데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하는 독자가 적지 않다. 한 독자는 e-메일을 통해 “여성에게 ‘여’자를 써야 한다면 남자에게도 ‘남’자 표기를 해야 하지 않느냐. 남녀 구분이 굳이 필요 없는데도 여성을 강조하는 듯한 인상이어서 시정을 해주었으면 한다”는 의견을 전해 왔다. 언어는 사회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를 바꾸는 실천이기도 하다. 그래서 언어를 인위적으로 바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나름의 의미는 있다. 적어도 불필요한 성 표현을 자제하는 것도 남녀 역할에 대한 잘못된 인식체계를 교정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서명수 고충처리인,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parky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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