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땅 우리멋]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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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무너질 듯하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탑 - . 천 삼백년이 넘도록 오롯이 한 자리에서 사나이의 웅대한 꿈과 그 아내와 애틋한 사랑을 전해주는 탑이 있다.

익산 미륵사지의 서탑이다.

전북 익산시 금마면은 옛 마한 땅이다. 위만조선의 마지막 왕 준 (準) 이 이곳으로 피신해 나라의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 나라 또한 오래지 않아 백제가 남진하면서 왕도 (王都) 의 명성만 남긴 채 역사에서 사라졌다.

백제 후기 어느 때였다. 이곳 오금산 (五金山) 밑 연동마을의 한 여인이 속칭 용왕 (아마 그는 백제의 어느 왕일 것이다) 과 관계를 맺어 아들을 낳았다. 용왕이 살던 연못은 지금도 남아 마룡지 (馬龍池) 라 부른다. 그 아들은 용의 기상을 물려 받은 듯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기골이 장대했다.

생계는 주로 오금산에서 나오는 마를 캐서 이어갔다. 사람들은 그를 서동 (薯童 : 마를 캐는 아이) 이라 불렀다. 이곳 오금산과 미륵사지 뒤편 미륵산에 오르면 지금도 한반도에서 가장 넓은 김제.만경평야가 눈앞에 펼쳐져 있다.

서동 역시 이곳에 올라 자신의 뿌리를 생각하면서 웅지를 키웠다. 왕손의 후예로서 백제를 다시 강성한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미천한 모습으로는 어림없다.

소문에 적국인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절세의 미인이라고 했다.

백제인인 그가 선화공주를 취한다면, 이는 곧 왕권을 되찾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삼국유사' 에는 서동이 선화공주를 취한 이야기를 자세히 전한다. 서동은 '고약한' 동요를 만들어 아이들로 하여금 부르게 했다. 내용은 '선화공주가 밤마다 몰래 서동을 품에 안고 잔다' 는 것. 이 노래 하나로 서동은 마침내 공주를 품에 넣고 왕위에까지 오른다. 바로 의자왕의 아버지인 무왕 (武王) 이다.

무왕 초기에는 신라와 백제가 다투지 않았다. 그러나 왕의 재임41년 중 11회나 전쟁을 치렀다. 승리와 패배가 교차했다. 그가 바라던 세상이 아니다.

이에 왕과 왕비는 고향인 금마로 돌아와 평화의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절을 세운다. 바로 미륵사다. 역사는 미륵사가 왕비의 간청으로 건립됐다고 전한다. 신라 진평왕이 석공을 보내 일을 도왔다. 당시까지 유행하던 목탑을 중앙에 놓고 동.서에는 돌로 탑을 세웠다.

3기의 탑을 두고 미륵부처가 다스리는 용화세계를 구현한 것이라고 하지만, 차라리 삼국이 이처럼 정립했으면 하는 기원이 더 서린 듯싶다. 또 지금은 비록 성처투성이로 외롭게 서 있지만, 서탑에는 '절세의 미인' 선화왕비의 모습이 어려 있다. 아마 무왕도 사랑스런 아내의 모습을 그 탑신에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륵사를 창건하면서 왕과 왕비는 뒷날 이 땅의 사람들이 영남이니 호남이니 하면서 싸운다면 우리의 사랑을 기억해 주길 바랐을 것이다.

미륵사지가 전하는 평화와 사랑에의 기원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익산 쌍릉' 으로 이어진다. 150m 간격을 둔 두 능의 주인공은 지금도 솔밭길을 오가면서 사랑을 속삭인다. 그 소리가 바람되어 나그네의 귓불을 건드린다.

◇ 볼거리 = 미륵사지 관람은 입구에 건립된 유물전시관에 먼저 들러 미륵사에 얽힌 설화와 최근의 발굴경과, 미륵사 모형도 등을 살펴보면 큰 도움이 된다.

무왕과 관련된 유적 이외에도 왕궁리 5층석탑, 삼기면 연동리 석불좌상, 여산면의 가람 이병기생가 등을 둘러볼 만하다. 특히 황등.함열 지역에서는 백제 후예들이 제작한 석공예품을 직접 감상할 수 있다.

◇ 먹을 거리 = 익산 쌍릉에서 익산시내 방향으로 5분거리에 '황토우 마을 (0653 - 833 - 5111)' 이 나온다. '익산 황토우' 는 익산지역 황토에서 키운 사료작물과 황토로 만든 지장수를 먹고 자란 이 지역 순수 한우를 말한다. 담백한 고기맛이 일품이다.

◇ 교통편 = 승용차로는 호남고속도로 익산IC로 빠져나와 이정표를 따라가면 된다. 철도나 고속버스를 이용할 경우 익산시에서 하차해 시내버스를 갈아타면 된다.

익산 = 최영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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