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현대-북한 합의 남북관계 전환 계기 삼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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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4시간 면담 끝에 굵직한 현안들을 합의하고 돌아왔다. 현대와 북한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가 금강산 관광, 개성 관광, 개성공단 체류 및 통행, 이산가족 상봉을 합의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중단 또는 제한됐던 주요 현안을 회복하는 내용이다. 핵과 미사일 문제 등으로 경색될 대로 경색된 그동안의 남북관계를 돌아볼 때 모처럼의 희망적 소식이라 우선 반갑다. 이번 면담 결과가 향후 남북관계의 발전적 해빙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그러나 이들 문제는 민간 차원의 합의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대부분 남북 당국 간 논의와 합의가 필요한 사안들이다. 이에 대해 정부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표명해 면담 결과를 당국 차원에서 대처할 뜻을 비쳤다.

북한은 이번 합의를 현대그룹에 대한 ‘시혜조치’로 포장했지만 잘 뜯어보면 북한식 대남 대화 제의로 해석할 여지가 많다. 남북 주요 현안에 대해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거나 전향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의지를 밝혔기 때문이다. 박왕자씨 총격 사망 사건을 염두에 두고 ‘김정일 위원장의 특별조치’로 금강산 관광의 편의와 안전을 보장한다고 밝힌 대목이 특히 그렇다. 또 일방적으로 강행한 개성 관광 중단과 군사분계선 통행제한 등도 원상 회복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올 추석 이산가족 상봉을 진행하겠다는 것은 남측이 가장 긴요한 현안으로 꼽는 사안이다.

미국 여기자들과 현대아산 근로자 송환에 뒤이은 이번 조치는 평화 공세의 성격이 짙다고 보인다. 2차 핵실험 이후 강화돼온 대북 압박을 완화하고 나아가 국면을 전환해 보려는 의도가 읽힌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합의의 의미를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북한의 의도가 어떻든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어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위한 중국의 설득 노력이 본격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북·미 간 대화도 머지않아 재개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둬야 할 시점이다.

북한 핵문제의 진전과 남북관계의 발전은 분리해서 다룰 수 없는 문제다. 그러나 둘 가운데 어느 한 가지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직된 접근 방법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시의성(時宜性)을 놓치지 않는 유연한 접근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정부가 북한을 향해 먼저 공식적으로 대화 제의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가을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회담이 좋은 출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그동안 제한했던 민간 차원의 대북 지원을 재개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북한도 우리 정부의 대화 제의에 대해 ‘조건 없이’ 화답할 것을 기대한다.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 관광을 재개하는 문제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박왕자씨 총격 사망 사건의 진상조사와 재발 방지 대책, 관광객 신변안전 보장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 등을 선결한다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어렵더라도 원칙을 훼손하지 않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내야만 남북관계를 건전하게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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