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언론 첫 ‘미 육군훈련소 포트 어윈’을 가다 <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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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식은 한식 올려요”
1호 식당 ‘취사반장’ 김종희씨

◆훈련소 ‘대장금’ 김종희씨=“이라크에 파병된 육군 중에서 내 밥 안 먹어본 병사는 없을걸요.” 김씨는 조리사 5명을 감독하는 1호 식당의 오후반 근무조 책임자다. 훈련소 식당 근무 25년째인 그는 청소일부터 시작했다. 그러다가 9·11 테러 직후인 7년 전에 한국계로서는 최초로 훈련소 주방장 직책에 올랐다.

매년 5만 명이 이곳을 거치기 때문에 그가 주방장이 된 뒤로만 35만 명에게 밥을 해줬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는 중책을 맡게 된 이유를 한국인 특유의 유전자로 설명했다. “바지런하고, 손맛이 좋잖아요. 오래 꾸준히 일하기도 했고요.”

김씨는 매일 조리사 5명과 함께 400~700명 분의 식사를 준비한다. 식단은 동양식, 이탈리아식, 미국식, 멕시코식 등으로 다양하다. 식단이나 조리법은 국방부에서 정해 놓았기 때문에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다. 하지만 김씨는 알게 모르게 한국의 맛을 음식에 녹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마늘과 생강 등에 미리 고기를 절여 둔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한식 맛을 가미해요. 고기가 한결 부드럽고 좋다고 해요.”

아직까지 한식이 별도의 메뉴로 지정된 적은 없지만 가끔 ‘한국식 특식’을 만든다. 김씨의 주무기는 불고기, 닭볶음탕, 오이김치다. “특히 감자가 함께 들어가는 닭볶음탕은 인기가 높아 곧 정식 메뉴로 채택될 것 같아요. 오이김치도 아삭한 맛에 많이 찾죠.”

식당에서 일하게 된 계기는 미군이었던 남편 오버튼(54)과의 결혼이다. 김씨는 1976년 주한 미군이던 그를 한국에서 만나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이후 6년간 루이지애나·텍사스·독일·한국 등으로 남편을 따라다녔다. “고생 많이 했죠. 아무도 모르는 낯선 땅에서 살기가 쉽나요. 살림에 보탬이 되려고 삯바느질까지 하고 억척스럽게 살았어요.”

그래서였을까. 그가 건넨 음식에선 ‘정성’이 물씬 느껴졌다.

“20년 복무가 목표죠”
아프간 7개월 참전 정연태 중위

◆아프간 다녀온 정연태 중위=“중간 기착지인 괌에서 출발하기 직전에야 실감이 났어요. ‘아프가니스탄에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요.”

포트 어윈 훈련소 주둔부대인 11기갑기병연대 소속 한국계 장교 정연태 중위는 7년 전 파병 당시 심정을 이렇게 전했다. 정 중위가 속한 2대대 187보병연대는 2002년 1월 미 육군으로는 처음 아프간에 배치됐다.

당시 정 중위는 ‘제대 말년’ 사병이었다. 95년 가족과 함께 이민 온 그는 98년 LA 인근의 크레센타 밸리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 학비를 보조받기 위해 4년 복무 기간을 조건으로 입대했다. 그의 부대는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 공항 방어를 맡았다. 칸다하르주는 탈레반의 본거지였다. 제대를 앞두고 전장으로, 그것도 적의 심장부 한복판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7개월 파병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제대했다. “다행히 당시엔 탈레반의 무기 공급 사정이 좋지 않아 저항이 거세지 않았죠. 복무기간 중 우리 부대에서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캘리포니아주립대(샌버너디노) 2학년 재학 중인 2005년 학사장교(ROTC)로 육군에 재입대했다. 그의 임무는 파병부대 훈련이다. 가상 적군 역할을 맡아 파병부대를 상대로 모의 전투를 한다. 지난해 말 결혼했지만 매달 2주 동안은 훈련소 내의 이라크 가상 도시에서 지낸다. “20년을 채우고 전역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동안 또 전쟁이 터져 국가의 부름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때마다 반드시 가족의 품으로 무사히 돌아올 겁니다.”

미주 중앙일보 LA지사 정구현 기자 koohyu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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