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 안 올리고 조용히 유동성 흡수할 듯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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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호 28면

KDI가 출구전략의 필요성을 제기했지만 한국은행과 정부는 부정적인 입장이다. 사진은 9일 금융통화위원회를 주재하는 이성태 한은 총재.

출구전략은 ‘판도라의 상자’다.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돈을 풀고 금리를 내리는 방향으로 진행돼온 경제정책의 전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상자가 열리면 기업과 가계의 이자 부담이 늘고 한계 기업과 계층의 살림이 어려워진다. 재정 투자에 기대 ‘불황 속의 호황’을 누려온 건설업도 버팀목을 잃게 된다. 돈줄이 마르고, 돈 벌 기회가 줄어드는 데 좋아할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언젠간 열 수 밖에 없지만 아무도 대놓고 얘기를 꺼내지 않아온 이유다.

한국의 출구전략은

이 상자를 지난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열었다. KDI는 21일 ‘경제환경 변화와 정책방향’ 보고서에서 ‘한국은 선진국보다 상대적으로 빠른 경기회복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취해진 각종 경기부양책을 거둬들이는 출구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둬들일 정책으론 서너 가지가 거론됐다. 국내 은행의 해외 채무에 대해 정부가 원리금 상환을 보증하는 것과 은행채를 포함한 회사채를 한국은행이 사주는 것, 중소기업에 대한 과도한 보증과 대출 회수, 금리 인상 등이다. 한마디로 지난해 9월 미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 이후 정부가 추진해온 저금리와 양적 완화 정책을 그만두라는 주문이다.

금융권과 재계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안 될 소리’라며 펄쩍 뛰었다. “지금같은 경기 부양 기조를 적어도 2011년까지 지속해야 한다”(22일 손성원 미 캘리포니아주립대 석좌교수), “출구전략은 아직 이르다”(23일 손경식 대한상공회의소 회장)는 반박이 잇따랐다. 정부도 확장적 경제기조를 너무 일찍 중단할 경우 경기가 다시 침체할 수 있다. 회복이 가시화할 때까지는 재정과 금융의 적극적 역할을 견지하겠다(25일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며 완화 기조 유지를 재확인했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17일 은행장들과의 월례 금융협의회에서 “경제 상황의 불확실성이 높아 현시점에서 출구전략을 본격적으로 거론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 논란이 잠잠해질 것 같진 않다. 경기가 살아나고 자산버블 우려가 커질수록 양적 완화 정책의 명분이 약해진다. 한은은 지난주 2분기 경제성장률이 전분기보다 2.3% 상승했다고 발표했다. 1분기(0.1%)보다 훨씬 좋아진 수치다. 수출과 민간소비, 설비투자도 몇 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증가했다. 실질 국내총생산은 21년3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기업부도는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이래 최저 수준으로 감소했다. 재건축 아파트 가격이 과거 호황기 수준을 회복했고 24일 코스피지수는 열 달 만에 1500을 다시 돌파했다. 경제 주체 사이엔 ‘조기 회복’에 대한 기대가 널리 퍼져 있다. “한국 경제가 너무 들떠 있어 디즈니랜드에 온 것 같다”(손성원 교수)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그런데도 정부는 한사코 출구전략이 논의되는 것을 경계한다. 좋아진 것처럼 보이는 수치에 숨은 함정들 때문이다. 2분기 성장률만 해도 기업 투자와 민간소비가 받쳐주지 않은 채 정부 홀로 돈을 퍼부어 얻은 결과였다. 김명기 한은 경제통계국장은 “2분기에 자동차 세제 혜택과 노후차량 교체 지원으로 0.8%포인트, 재정지출로 0.7~0.8%포인트의 GDP 상승 효과가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이 두 가지 요인이 아니었더라면 경제가 사실상 제자리였다는 얘기다. 실제 올 1분기엔 지난해 1분기에 비해 공공부문이 1.9% 성장한 반면, 민간부문은 -6.2%의 역성장을 보여 GDP 성장률이 -4.2%를 기록한 바 있다.

비교 시점인 지난 분기 지표가 워낙 나빴던 데 따른 기저효과도 착시현상을 불러왔다. 2분기 설비투자가 전 분기보다 8.4% 늘었다지만 1년 전과 견주면 17.2% 감소했다. 수출과 수입, 민간소비 등 다른 경제지표도 비슷하다. 노대래 기획재정부 차관보는 23일 “전기 대비 성장률이 아니라 전년 동기 대비로 성장률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전년 동기 대비로 본 2분기 성장률은 -2.5%다.

문제는 이런 논리로 버티는 데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저금리와 양적 완화가 본격적인 투자와 소비로 이어지기도 전에 주식시장과 집값이 들썩이고 있다. 실물 경제의 안전판이 돼야 할 이런 정책들이 자산버블의 지렛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경기가 일찍 살아나지 않는다면 통화량을 늘려도 투자와 소비가 살아나지 않는 유동성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이럴 경우 일시적으로 치솟은 자산가격도 다시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KDI의 지적도 금리와 유동성이 거품을 부풀려 더 큰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경고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2001~2002년 정보기술(IT) 버블 붕괴와 9ㆍ11 테러에 대응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금리를 내렸다. 그러나 몇 년간 재미를 본 이 정책은 주택가격 버블 붕괴와 함께 대공황 이후 80년 만에 가장 심각한 경기침체를 불러왔다.

한은과 정부가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한은은 이미 시중에 풀린 돈을 회수하는 중이다. 한은이 공급한 본원통화 잔액은 3월말 71조7101억원까지 늘었다가 5월 말 59조9164억원으로 11조8000억원 감소했다.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으로 민간에 공급한 유동성이 지난해 12월 말 7조8000여억원에서 5월 말 1조8000여억원으로 줄었다.

최근 반 년간 통안채를 발행해 시중에서 흡수한 돈만 33조원이다. 금리인상을 빼면, KDI가 지적한 방향대로 가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한은은 한사코 출구전략을 부인한다. 경제 주체들에게 미칠 심리적 영향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한국외국어대 임기영(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세계 경제가 동조화된 상황에서 한국만 금리를 올린다고 별다른 효과가 없을 것”이라며 “경기 회복과 재정 악화 속도, 자산 버블 정도를 감안해 지금처럼 조용히 유동성을 흡수하는 정책을 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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