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잃어버린 한 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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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여야는 비정규직의 해고 규모로 설전을 하고 있다. 비정규직법으로 인해 해고 대란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사태를 과장하지 말라고 야당은 주장한다. “업체마다 돌려막기를 하기 때문에 순수 해직은 몇 만 명에 불과할 것이다” 혹은 “30%는 정규직으로 전환됐으니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들 눈에는 일터에서 쫓겨난 한 사람 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몇 만 명, 몇 %라는 숫자만 보일 뿐이다. “지금 너무 생활이 힘들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눈치 보이고 울컥할 때도 많지만 그때의 월급이라도 받고 싶다” “정말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다.”(이코노미스트, 너희가 우리의 슬픔을 아느냐) 이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정치라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전쟁을 얘기할 때 “그때 몇 십만 명의 전사자를 냈다” “어느 장군의 전략이 결정적이었다”고만 기억한다. 죽어간 몇 십만 명 한 사람 한 사람의 아픔과 사연에는 관심이 없다. 세상을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대결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하는 공산주의자들은 몇 십만, 몇 백만을 죽이고도 태평했다. 개념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한 사람’은 의미가 없다. 개념과 숫자로 세상을 보면 모든 게 너무나 선명하다. 마치 비행기나 우주선에서 세상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 한반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지만 그 한반도 안에 사는 4500만 명의 일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 한 명의 사정을 알려면 우주선·비행기에서 내려와 두 발로 걸어야 한다. 걸으면서 몸으로 느껴야 한다. 만나야 한다.

정의와 평등이라는 개념으로 이 세상을 보면 곧 그런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을 들여다보면 세상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그렇기 때문에 유토피아를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닫는다. 역사에서는 ‘하루아침에…’라는 말이 있을 수 없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는 바른 방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뿐이다. 일자리는 국회가 법으로 만들라고 해서 생기는 게 아니다. 국회가 평생 고용을 명령한다 해도 평생 고용할 수가 없다. 회사가 망한다면 일자리가 어디서 나오겠는가? 공공분야로 대신한다는데 국민들이 세금을 낼 수 있어야 공공분야도 있는 것이다.

기업인 역시 종업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경제성과 효율성만으로 세상을 본 결과가 지금의 세계 금융위기 원인이며 신자유주의의 불행이다. 숫자로만, 이익의 규모로만 세상을 본다면 몇 사람은 더 부유해질지 모르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불행한 세상을 살 수밖에 없다. 자신은 종업원보다 수십 배를 받으면서도 경제성을 위해 비정규직 한 명은 잘라야 한다면 그런 세상을 누가 원하겠는가. 기업 역시 ‘한 사람’을 배려하고 관심을 가질 때 비정규직 문제는 풀리는 것이다.

지금 우리 국회가 이 모양이 된 이유는 제도가 잘못되고 규정이 없어서가 아니다. 우리에겐 이미 민주주의가 넘쳐나고 있다. 여기서도 ‘한 사람’이 문제이다. 본회의장에서 노숙자들처럼 돗자리를 끼고 다니며, 통닭을 나눠 먹어 가며 시시덕거리는 모습들, 이러고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다. 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나는 의원의 품위 때문에, 아니 내 인격 때문에 그런 짓 못한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지금 우리 정치인들은 그런 작은 용기조차 없다. 모두 패거리에 묻힌 군중일 뿐 진정한 ‘한 사람’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

‘한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고 거창한 말로 국민을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는 정치를 나는 믿지 않는다. 숫자로 성장과 발전을 말하지만 한 사람의 불행에 무감각한 경제를 나는 믿지 않는다. 정의와 평등, 성장과 경제성을 아무리 외쳐도 거기에 인간이 빠져 있다면 죽은 조개껍질의 나라일 뿐이다. 휴머니즘은 개념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한 사람을 걱정하고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것은 개념의 지식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와 실천에서 체득되는 것이다.

문창극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