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뒤집어야 할 '정치원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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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는 미국을 민주주의의 모델로 쉽게 생각하고 있지만 미국의 독립선언문에도, 미국헌법에도, 워싱턴 초대대통령의 취임연설에도 민주주의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제퍼슨이 기초한 독립선언문에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자유는 침해될 수 없는 권리' 라고 돼 있지만 제퍼슨.워싱턴도 수십명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

노예제.인종차별은 미국민주주의가 내포한 치명적 모순이었다.

그리고 그 모순과의 처절한 대결이 미국민주주의의 역사다.

자유와 평등을 위해 미국이 그동안 치른 희생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그것이 바로 미국의 역사다.

말하자면 미국의 민주주의는 그런 고통의 과정 (過程) 이었지 성취된 현상 (現狀) 이 아니다.

황차 우리에겐들 민주주의가 성취된 현상인가.

헌법에 민주주의라는 말이 나오고 역대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모두 민주주의를 말했다고 한국정치가 민주주의인가.

국회는 하찮은 일로 몇 달 동안 마비되고 정당은 국민의 이익과 상관없이 자기생존만을 위해 부산하지 않은가.

아무래도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또 그것은 민주주의 원리에 대한 몰이해 (沒理解) 의 시정에서 시작돼야 한다.

첫째, '의회정치가 곧 민주주의' 라는 원론은 허구다.

의회정치는 중세에도 있었고 절대왕권시대에도 모양을 갖추기 위해 있었다.

민주주의에서는 그 구성과 기능이 전시대의 의회와 다르기 때문에 의회제도를 갖춘 것만으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다.

의회는 자유로운 논의를 거쳐 국책을 결정하고 입법을 하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 국회는 소속정당이 정한 틀 (당 방침) 속에서 논의 (발언) 하고 장관은 관료가 써준 원고로 답변할 뿐이어서 시대의 정곡을 찌르는 토론, 역사의 줄기를 잡아가는 연설은 없다.

거기다 법률안을 수십건.수백건 쌓아 놓고 의석수 숫자노름만 하고 있으니 국민의 대표기관이랄 게 없다.

또 자유로운 토론은 자유투표로 연결돼야 한다.

'다수결원리는 민주주의' 인 것으로 착각되지만 다수결이 반드시 선 (善) 은 아니다.

다수결원리 (국민투표)에 의해 프랑스혁명을 나폴레옹에게 횡령당했고 히틀러도 다수결원리를 이용해 독재권을 확립했다.

다수결원리가 민주주의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은 3선개헌 등 우리나라 의정사 (議政史)에서도 그 예를 찾기 어렵지 않다.

다수결원리는 자유투표제가 정착되고 소수의견도 끌어안는 풍토에서 비로소 민주적이다.

의원빼가기나 정당내의 투표단속, 혹은 자유투표 결과에 대한 책임론 등은 그런 의미에서 비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양당제도는 민주적이고 정치인의 이합집산은 곧 야합으로 보는 고정관념은 깨뜨려져야 한다.

양대당 (兩大黨) 체제가 민주주의에서 바람직하다는 것은 두 가지 조건을 전제로 한다.

당내 민주주의가 확립될 것과 또 하나는 그 정당이 정책정당 - 보수 또는 진보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정책정당인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주요 정당은 정책정당이 아니었다.

독재정권의 시녀 아니면 장기집권을 종식시키자는 투쟁정당이었을 뿐이다.

이 대결은 36년 만에 이룬 정권교체로 막이 내렸고 그 대결의 정당들도 역할을 다한 셈이다.

역할을 다했으면 변해야 한다.

더욱이 지금의 야당처럼 중심도 없이 마지못해 몰려 있는 '군거 (群居) 정당' 이나 여당처럼 어미닭의 품에 병아리들이 안겨 있는 듯한 '닭장정당' 은 변해야 한다.

정책위주의 양당체제는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적인 새 정당질서를 위해서는 경색된 기존정당의 틀이 우선 무너져야 한다.

이합집산도 나쁠 것이 없고 일인일당 (一人一黨) 인들 어떤가.

거창한 이념을 내세울 필요는 없다.

지역주의정당.고비용정치의 청산을 합동으로 실천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보스의 눈치만 보는 '건달정치' 가 아니라 미래에 대비해 일하는 정치, 힘겨루기 국회가 아니라 생산성 있는 국회를 위해 기존정당의 틀을 깨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국민들은 새 정치질서를 위한 그러한 몸부림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성취된 현상이 아니고 고뇌의 역정 (歷程) 이다.

현재의 정당질서, 현재의 국회운영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민주주의의 이상에 한 발짝을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관념적 정치원리를 뒤집고 현재의 정치틀을 깨뜨려 가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자꾸 겪어야 한다.

김동익(성균관대 석좌교수.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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