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갑의원은 누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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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한화갑총무는 운명론자다. 김대중대통령의 '동교동 가신' 으로 30년간 외길 인생을 살아오면서도 불만 한마디 토로한 적이 없다.

힘들었던 3공.5공 시절 金대통령이 가끔 "자네들 내 밑에 와서 고생만 하게 해서 가슴 아프네" 라고 위로하면 그는 즉각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건 우리 팔자지, 총재님이 걱정하실 문제가 아닙니다" 고 말하곤 했다.

그가 태어난 곳은 金대통령의 출생지인 전남신안군 하의도에서 서쪽으로 10㎞ 떨어진 우이도이고, 고향선배의 도전과 집념을 사표로 간직한 채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가 金대통령과 정치적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67년 7대 총선에서 목포선거에 출마한 DJ의 운동원으로 뛰어들면서부터지만 운명적인 끈은 훨씬 오래 전부터 맺어져 있었던 셈이다.

그는 동교동 생활 동안 세 번 투옥됐다. 78년 새해 첫날 서울대병원에 입원중인 DJ를 찾아갔다가 교도관 허락 없이 병실에 들어갔다고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돼 9개월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10년 뒤인 88년 13대 총선에서 그의 발목을 잡았다.

평민당의 황색돌풍이 호남지역을 휩쓸었던 이 선거에서 그는 형실효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출마자격을 박탈당했다.

그가 금배지를 단 것은 정계입문 25년만인 92년 14대 총선 (전남 신안) 때였다.

세 번의 감옥생활을 거치면서 그는 78년부터 81년까지 4년 동안 여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면서 그는 철저한 애처가가 됐다.

10살 연하인 부인 정순애 (鄭順愛.50) 씨는 세종대의 전신인 수도여사대 메이 퀸 출신. 오랜 야당생활 동안 중.고교 미술교사였던 鄭여사의 수입으로 생계를 꾸려온 그는 두 가지 결심을 했고 그대로 지켰다.

바람 피우지 않겠다는 것과 설거지와 빨래 등 집안일을 할 수 있는 한 돕겠다는 것이었다. 韓총무의 별명은 '리틀 DJ' 다.

연설 때의 말투나 제스처까지 DJ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의 삶 전체가 DJ를 향한 것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39년 전남 신안 출생

▶63년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97년 항공대 항공교통과 대학원 졸업

▶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등으로 세차례 투옥

▶85년 민추협 운영위원

▶88년 평민당 정책실장.국제위 부위원장

▶14, 15대 국회의원

▶98년 3월 국민회의 원내총무대행

▶98년 6월 국민회의 원내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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