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석 칼럼]준비할 때와 버릴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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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을 준비된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도 나라경제가 '국제통화기금 (IMF) 구제' 에 이르게 되자 다른 일반 사람과 마찬가지로 거기에 대해서는 별도의 준비가 없었음을 두번에 걸쳐 드러냈다.

지난해 대통령선거 운동기간중 IMF구제 프로그램의 수용에 반대했던 것이 그 첫번째였다.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설마 나라경제가 이 지경에까지 이른 줄은 몰랐다는 제스처를 쓰면서 능란하게 종전의 적극 반대 입장에서 적극 수용 입장으로 전향 (轉向) 했던 것이 그 두번째였다.

IMF프로그램이라는 전쟁 (戰爭) 현실이 우리에게 직접 요구하는 것은 당장 살아남으려면 '구조개혁' 을 하라는 것이다. 구조개혁은 사상 (思想) 이나 모델이 아니라 시급한 당면 '현실 (praxis)' 이다.

아마 金대통령은 임기 전체를 IMF구조개혁 한 가지에 바쳐도 시간이 절대적으로 모자랄 것이다.

이 준비되지 않았던 전쟁과 대비하면 金대통령의 잘 '준비된' 모델로서 지금까지 드러난 것 가운데는 다음 두 가지가 두드러진다.

하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고 다른 하나는 '햇볕론' 이다. 민주주의.시장경제는 각각 일견 너무도 평범한 시대적 표어라서 거기에는 아무 시빗거리가 붙을 수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두 단어를 '와' 자로 이은 준비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의 모습은 구체적으로는 바로 '노사정 (勞使政) 합의체제' 였다는 점을 알게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 합의절차는 단순하게 보면 구조조정과정에서 발생하는 고통을 분담하겠다는 카타르시스적 의식 (儀式) 이라고도 볼 수 있다.

비극 (悲劇) 이나 예배, 굿판처럼 말이다.

그러나 노사정위를 통과한 안건을 국회, 특히 야당이 감히 거역할 수 없으리라는 계산을 깔고 있는 것이라면 이것은 여소야대 (與小野大) 국회에서 노조대표의 동의를 등에 업고 야당을 제압하는 고등전략이란 측면이 더 강하다.

재무구조 개혁이란 정부의 생살부 (生殺簿) 앞에서 안 그래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사 (使.대기업 오너) 는 노사정위라는 이름만 듣고도 지레 완전히 제압된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때문에 오히려 민주주의는 조합주의가, 시장경제는 지시경제가 되고 말 수 있다. 그런데 '노사정 민주주의' 에서 노조대표의 동의를 받아내려다 유실되고 마는 것은 구조개혁이라는 사실이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구조개혁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잃어 가면서 경제활동은 예상을 훨씬 넘는 마이너스 성장률의 골짜기로 떨어져 가고 있다.

한편 노조대표들만은 사 (使) 나 정 (政) 과 달리 노사정위 안에서 겁이 없다. 떠내려가는 구조개혁을 건져내려고 金대통령이 자기네의 단기적 이익 (극히 일부에게는 장기적 혁명 목표) 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뺨 맞아 가며 꼭두각시 노릇은 못하겠다면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노사정위 불참을 선언하고 돌아서 버렸다.

'햇볕론' 도 모델로서는 흠잡을 데가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만일 경제력으로 햇볕을 삼으면 우리에게 북한의 외투를 벗길 수 있는 열 (熱) 능력이 없다. 만일 국민의 무한히 따뜻한 마음으로 햇볕을 삼으면 유사시 국방에 관한 '도덕적 해이' 를 걷잡을 수 없다.

3주전 북한이 보낸 잠수정이 해군 아닌 어업용 정치망에 걸린 뒤 국방장관도 해군참모총장도 벌을 받기는커녕 특히 국방장관과 안기부장은 햇볕론의 선두주자 노릇을 하는 발언만 늘어놓았다.

이처럼 무서운 도덕적 해이가 어디 또 있겠는가.

그러자 국민은 불안에 사로잡혔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잠수정이, 얼마나 많은 요원들을, 무슨 목적으로 어떤 일을 꾸미느라고, 얼마나 자주 싣고 남으로 들어오길래 잡지도 않았는데 제풀에 고장나 표류하고 고기잡는 그물에 걸리고 죽어서 해안에 떠밀려 와 있는가 하는 것이 이 불안의 이유있는 내용이다.

햇볕론은 외투를 벗기는 대신에 저들이 시원한 동해 물밑을 수영하도록 잠수복을 입히고 있다. 국민의 안보불안만큼 구조개혁을 늦추고 마이너스 성장을 가속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살아남는 길은 실업자에게 밥을 주고 새 일자리를 위한 기술 재교육을 실시하는 것말고는 오직 구조개혁에 일로매진 (一路邁進) 하는 것뿐이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의 '민주주의와' 와 '햇볕론' 은 잘 준비됐으면 잘 준비됐을수록 준비되지 않은 구조개혁의 촉진을 위해 빨리 창고속 깊은 곳에 넣어야 한다.

이런 것이 나돌아다니다가는 구조개혁을 계속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강위석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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