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고집 대한전광·대일화학·한국정밀 튼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4면

동화상 전광판을 만드는 대한전광 김재을 (44) 사장에게 '부도 공포' 란 없다.

지난 81년 회사설립 이후 18년동안 단 한 차례도 어음을 발행하지 않은 덕분에 만기 도래한 어음을 막기 위해 은행문을 드나들 필요도, 거래기업에게 어음만기를 연기해 달라며 통사정할 필요도 없다.

대한전광의 대차대조표에는 '지급어음' 항목이 아예 나타나지 않는다.

김사장이 어음발행을 금기시 해온 것은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의 경험 때문. 김사장은 "중소기업 사장은 관리.영업은 물론 기술개발까지 관여해야 하는 데도 돈 끌어들이는 데 온 정신이 팔려 나머지를 엉망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며 "회사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고 싶어 어음을 사용하지 않게 됐다" 고 밝혔다.

물론 어음발행의 유혹도 많았다. 뻔히 돈이 보이는 사업이 있어도 애써 자제해야 했고 현금만으로 거래하려다 보니 원자재 수급에 차질이 빚어져 납기일이 늦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사업개시 14년만인 94년에서야 겨우 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남의 돈으로 사업확장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행 직원으로부터 "남들은 1백원으로 3백원짜리 장사를 하는데 당신은 50원짜리 밖에 못하고 있다" 는 소리까지 듣기도 했다는 것.

그러나 IMF이후 광고시장의 급격한 위축으로 지난해 30여개에 달했던 동종 업체들중 절반이 문을 닫았지만 대한전광만은 매출액을 상향조정 (80억원) 하고 새 사옥에 입주하는 등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

김사장은 "빚에 의존하는 중소기업은 더 이상 생존이 불가능하다" 며 "돈이 없으면 새로운 사업을 벌이지 않는 것이 원칙" 이라고 말했다.

대한전광처럼 어음을 발행하지 않고 현금으로만 거래를 해온 기업들이 국제통화기금 (IMF) 시대를 맞아 모범기업으로 각광받고 있다.

지난 1~4월중 부도업체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배 가까이 늘어난 1만2천여개. 그러나 어음을 발행하지 않는 기업들의 경우 빚이 그만큼 적은 데다 어음사용을 통한 무리한 확장을 피해온 탓에 '부도 무풍지대' 로 자리잡으며 최악의 경제위기를 헤쳐나가고 있는 것이다.

의약품을 생산하는 대일화학도 지난 96년 이후 어음발행을 중단했다.

어음때문에 몇 차례의 부도위기를 넘겨야 했었기 때문이다.

어음을 발행하지 않으니 만기에 맞춰 자금을 끌어와야 하는 부담도 없고 하청업체에 현금결제를 하다보니 대외 이미지도 크게 높아졌다.

특히 어음발행을 중단한 이후 회사 재무구조가 점차 견실해지고 있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이 회사 박창식 이사는 "어음을 사용하면 씀씀이가 헤퍼지는 경향이 있다" 며 "어음발행 중단으로 일시적 현금부족으로 애를 먹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재무상태가 좋아지고 있다" 고 말했다.

특수차량을 제작하는 ㈜한국정밀도 어음을 발행하지 않는다.

대기업으로부터 받은 어음을 할인해 사용하고 현금으로 부품 원자재값을 지불하다 보니 산술적으로는 분명 손해지만 단 한번의 자금부족으로 어음부도를 맞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 큰 손실을 아니라는 것이다.

매출이 3백50억원에 어음발행액은 20억원에 불과한 두인전자도 내년부터는 아예 어음발행 자체를 중단할 계획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우리 기업들의 재무구조가 부실해진 이유중의 하나가 빚의 일종인 어음발행" 이라며 "외국기업과의 경쟁에서 성공하려면 무분별한 차입과 어음발행 관행을 과감히 고쳐나가야 할 것" 이라고 말했다.

김준현.윤창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