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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아무나 해도 된다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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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당신이 지리산 청학동에 산다고 해도 정치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독도나 마라도에 있는 사람에게도 정치는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정해준다. 신체를 구속할 수도 있으며, 돈도 걷어가며, 군대로 데려가기도 한다. 그것도 모자라 당신의 머릿속도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

정치는 법을 통해 당신을 그토록 철저히 관리한다. 황당하고 불쾌하지만 정치는 당신의 아랫도리도 관리한다(간통죄라는 것이 있다). 당신이 정치에 관심이 있든 없든 상관없다. 정치는 당신을 무관심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정치는 당신의 행동만이 아니라 ‘정신세계’도 지배한다. 정권의 성격(솔직히 말하면 대통령의 성격)은 개인의 성격에 아주 크게 영향을 미친다. 프랑스의 작가인 장 폴 뒤부아는 『프랑스적인 삶』에서 한 프랑스 남자의 자화상을 다섯 번이나 바뀐 정권의 변천사 속에서 밀도 있게 그려냈다. 9부로 된 목차 자체가 프랑스의 대통령 이름으로 되어 있다.

사실 그런 소설을 쓰기에는 한국 현대사가 제격이다. 개인의 내면적 자화상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 보면 우리의 대통령들보다 더 훌륭한 소재가 있을까. 예컨대 『한국적인 삶』이라는 소설의 목차가 1. 이승만 2. 윤보선 3. 박정희 4. 최규하 5. 전두환 6. 노태우 7. 김영삼 8. 김대중 9. 노무현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라. 이들이 한국인의 삶에 끼친 정신적 충격을 감안할 때 얼마나 극적인 소설이 탄생할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당신이 정치에 아무리 냉소적이어도 정치는 당신으로부터 단 1㎝도 떨어지지 않는다. 원하지 않더라도 정치는 당신의 삶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현실적 지배력이다. 그 때문에 정치는 사회에 대한 철학, 의지, 전문성이 없으면 해서는 안 된다. 정치는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의 영역이다. 우리 정치의 끔찍한 불행은 정치가 갖는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 엄청난 힘을 아마추어들이 다룬다는 사실이다. 선거에 나가 당선되었다고 저절로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영화를 보고 평론은 할 수 있지만 영화를 그처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적인 축구 클럽의 전술에 대해 비평할 수는 있지만 그들처럼 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왜 정치는 아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외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외교는 전문가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외무고시를 합격한 외교관에게 그 일을 맡긴다. 재판은 매우 전문적 영역이기 때문에 사법고시를 합격한 사람들에게 맡기는데 그것도 일정한 연수를 거쳐야만 한다. 군인이나 경찰, 의사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학교는 있는데 왜 정치는 전문적으로 교육하지 않는 것일까?

정치가 외교보다 쉽다고? 천만의 말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정치다. 정치는 ‘어젠다(Agenda)’를 ‘논어젠다(Non-Agenda)’로 바꾸는 기술이다. 이슈를 이슈가 안 되게 만드는 타협의 기술이다. 불확실한 것을 확실하게, 불투명한 것을 투명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좋은 정치는 그 일을 국민들이 모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좋은 정치는 모두가 잠든 새벽에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차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정치는 여름 대낮에 아파트 단지에서 수박을 파는 트럭처럼 시끄럽다.

정치적 견해를 결정하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모든 사람의 의견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다. 만장일치. 이건 불가능하다. 둘째, 반대자의 견해를 폭력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전쟁이나 독재로 가능하다. 이건 악순환이다. 그래서 셋째, 협상을 통해 타협을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필요한 이유다. 협상과 타협은 외교보다 훨씬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한다. 소시지 만드는 과정과 정치 협상 과정은 절대 들여다보지 말라지 않는가. 역겨워서 못 본다는 뜻이다. 정치란 원래 그런 것이다.

협상과 타협의 정치가 되려면 민주주의를 제대로 훈련받은 정치인이 해야 한다. 그도 아니라면 초보 정치인을 보좌하고 지원할 전문인력을 포함한 안정적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이도 가능하지 않다면 최소한 협상과 타협을 이해하는 경륜의 정치인들이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에겐 어느 것 하나 없다. 정치가 전쟁으로 가는 이유다.

군사정권 때인 1970, 80년대는 육사 출신들 데려다 썼다. 90년대 이후에는 운동권 출신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그런데 지금은? 정치인이 전문적으로 양성되지 않는 것은 나라에 큰 재앙이다. 경험 많은 원로 정치인들은 뒷방으로 내몰리고 시스템은 아직 자리 잡지 못했다. 그래서 걱정이 태산인데 오늘 또다시 국회에는 전운이 감돈다.

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