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살 헤론 상병의 전사, 그리고 네 자녀는 뿔뿔이 흩어졌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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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호 06면

2009년 6월 15일 오전, 부산시 남구 대연 4동 유엔기념공원(UNMCK). 박은정 홍보과장은 책상 위에 놓인 누런 갱지로 된 좀 큼직한 편지 봉투를 뜯었다. 발신은 영국, 발신자는 캐시 바시크(63). 뜻밖에 5000원짜리 한국 돈 7장이 나왔다. 그리고 손으로 쓴 편지가 있었다. “7월 3일 공원에 합장돼 있는 부모님의 묘에 헌화해주세요. 저와 제 형제들에게 아주 큰 의미가 있답니다.” 아버지 제임스 헤론과 어머니 엘렌 헤론은 UNMCK 32-6-1, 무덤번호 1609에 이미 8년째 함께하고 있다.

영국서도 한국전쟁의 비극

6·25가 한창이던 1951년 11월 16일 오후 7시5분. 121 미군 야전병원으로 영국군 병사가 실려 들어왔다. 제임스 헤론 상병. 당시 문서에 따르면 그는 영동포(영등포를 잘못 표기한 듯) 집결소에서 이송돼 왔다. 팔다리에 집중된 부상은 너무 심했다. 소식은 영국에 알려져 신문에까지 났었다. 부인과 장모는 한국으로 날아올 채비를 했다.

의사들이 조치를 취했다. 다리도 절단했다. 그러나 상병은 견디지 못했다. 그는 숨을 거뒀다. 사망 원인을 문서는 ‘미사일로 인한 오른손 팔다리 부상, 왼쪽 다리 수술로 절단’으로 기록했다. 사망 확인서엔 왼쪽 다리 절단을 의미하듯 시커멓게 칠해져 있다.

5일 뒤인 21일 오후 2시. 그는 사체 봉투에 담겨 부산 당곡의 유엔군 묘지에 매장됐다. 십자가가 꽂혔다. 사망확인서를 담은 병도 머리맡에 묻혔다. 그게 끝이었다. 나이 딱 서른. 신장 175㎝, 피부가 하얗고, 머리카락이 갈색이라고 확인했던 사망확인서는 눈동자의 색을 기록하지 못했다. 멀리 영국에 젊은 부인과 올망졸망한 애들을 남긴 채 영원히 굳게 닫혔기 때문이다. 진급과 크리스마스 신년 휴가를 한 달여 앞둔 시점이었다.

헤론은 베테랑 군인이었다. 40년 입대해 죽은 해인 51년엔 이미 군생활 11년째였다. 입대 직후 그는 벌써 3년반째 군에서 근무하고 있던 상큼한 처녀 엘렌 이병을 만나 41년 결혼했다. 2차 대전은 그들의 신혼을 방해했다. 헤론 상병은 결혼하자마자 해외로 파병됐다. 버마에서는 14군 2사단 소속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이 3만 명 전사했다는 악명 높은 인팔 전투다. 이 전투에서 그는 왼쪽 눈을 크게 다쳤고 한때 눈이 멀기까지 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46년 전역했다가 몇 개월 뒤 다시 입대했다. 한국전이 벌어지기까지 가족은 행복했다. 세른클리프의 군관사에서 살았고 애들도 네 명이나 생겼다. 상병과 가족 모두에게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51년 8월 31일. 14일간의 휴가를 끝낸 로열 노포크 연대 소속 헤론 상병은 서섹스 역을 떠났다. 떠나기 위해 기차를 탄 아빠에게 샌드위치를 건네는 아들과 이를 지켜보는 아내의 모습이 당시 신문에 실렸다. 엠파이어 오웰 호에 탄 헤론은 싱가포르에서 엽서를 보냈다. 여유가 있었다. 10월 1일 한국에 도착한 뒤 그는 불타는 전선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얼마 뒤인 11월 16일 전사했다. 한국 도착 딱 한 달 보름 만이다. 전사 경위는 아직 모른다. 딸 캐시는 “엄마한테 ‘아빠가 지뢰밭에 들어가다 다쳐서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다 지난해 같은 부대에 있던 아버지의 전우 한 분으로부터 “군수품을 갖고 오는데 운전병이 잘못해 지뢰밭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다.

전사 소식을 담은 전보는 11월 중순의 토요일 늦은 밤에 집으로 전달됐다. 마음 졸이고 있던 엄마가 전보를 받고 충격에 빠지는 모습을 당시 맏이던 여덟 살 지미가 봤다. 지미 아래로 당시 캐시는 다섯 살, 대니는 세 살, 막내 패트릭은 9개월째. 잠자리에 들기 전 몸을 씻기 위해 목욕탕에서 떠들썩하던 시간이었다. 캐시는 그때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최근 오빠한테 들어서 알게 된 얘기다. 아빠 없이 남겨진 철부지 네 명 아이와 젊은 엄마….

캐시 가족의 삶은 곧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헤론의 부인 엘렌은 앓아 누워 병원으로 실려갔다. 아이들은 몇 주씩 다른 낯선 집에 뿔뿔이 맡겨졌다. 보살핌을 위해서긴 했지만 따스한 엄마 품이 없고, 같이 놀 형제도 없는 집은 추웠다. 얼마 뒤엔 관사를 비우라는 통보마저 왔다. 겨우 살 집을 찾았지만 엄마는 충격과 슬픔에 무너져갔다. 돈을 벌 엄두도 못 내고 아이들을 제대로 살필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엄마 품에서 강제로 떨어져서 흩어져야 했다.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의 운명은 한국이나 영국이나 비슷했다.

지미는 도버에 있는 듀크 오브 요크(Duke of York) 군사 기숙 학교 (boarding school)로 보내졌다. 형편이 어렵거나 부모 없는 아동들을 맡아 기르는 곳이다. 8살 지미는 거기서 먹고 자고 학교를 다녔다. 비용은 군이 댔다. 캐시도 런던의 수녀원 부속 시설로 갔다. 어린 동생들은 맨스턴의 보육 시설로 보내졌다. 뿔뿔이 찢어진 네 형제는 65년까지 아주 가끔 볼 수 있었다.

캐시는 “오빠와 동생이 있다는 걸 알고도 만날 수 없는 게 너무 서러워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했다. 더 슬프게도 그들은 그 이후 한번도 함께 살 수가 없었다. 형제들은 15살에 기숙학교를 나와 생업에 종사했다. 캐시는 “아주 다양한 일을 했고, 그래서 지금 나쁘지 않게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부모 없는 삶은 불행한 것”이라고 했다.

엘렌의 삶도 굴러내리기만 했다. 다른 남자와 살림도 꾸렸지만 정상 생활이 안 됐다. 학대까지 받아가며 삶의 바닥까지 떨어진 어머니는 긴 방황 끝에 75년 스코틀랜드에 사는 캐시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 뒤 함께 살게 됐다. 그리고 세월은 흘렀다.
엘렌은 마침내 84년, 70세 때 부산에 있는 남편의 무덤을 찾았다. 한국 정부가 지원했다. 젊어 떠났다가, 외롭게 죽어 이제는 흙 속에 누워 있는 그리운 이를 33년 만에 다시 만났다. 엘렌은 울었다. 지난 삶을 생각하며 흐느꼈고 ‘죽기 전 남편 무덤을 보고 싶다’ 는 소원이 이뤄져 더 울었다.

다시 세월이 흘러 2001년 1월 10일 엘렌 헤론은 86세로 사망했다. 엘렌은 화장됐고 유언에 따라 유골은 부산의 남편 곁에 안장됐다. 캐시가 모셔왔다. 51년 11월 이후 고단했던 삶을 떠나 편안해진 것이다. 묘비엔 ‘함께 영원히 잠들다’라고 기록됐다. 캐시는 “내가 기억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어머니는 ‘아버지 옆에 묻히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소원이 이뤄졌다”고 했다. 그는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만 한 게 아니다. 우리가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존경했다”며 “아버지가 동료 전우와 편히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말할 수 없이 기뻤다”고 했다.

가족들의 한국 방문이 이어졌다. 다시 한국 정부가 도왔다. 2004년 다시 남편, 딸 반다와 함께 호주 방문길에 부산에 들러 부모님께 인사를 했다. 남동생 대니는 2005년에 왔다. 캐시는 다시 남동생과 지난해 11월 부산을 찾을 수 있었다. 그사이 부산에서 사람을 알게 됐고 그를 통해 자주 부모님 묘에 헌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올해는 사정이 곤란해졌다. 아는 그 사람이 직장 때문에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됐다. 그래서 봉투에 돈을 넣어 UNMC 사무실에 부탁한 것이다. 캐시는 “7월 3일은 내 생일이라 부모님에게 꽃을 바치기 아주 좋은 날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다”고 했다. “아빠라고 부르던 어린 시절이 얼핏 기억난다. 아버지는 영원히 내 맘속에 살아 있다. 생일날 사랑하는 부모님께 꽃을 드리고 싶다”고 했다. 애틋했다.

19일 캐시와 e-메일을 주고받았다.

-남의 나라를 위해 아버지가 죽고 그래서 당신 가족은 고생을 했다.
“아버지의 죽음에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 북한이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말도록 기도한다. 신이여 도와주소서.”

-한국에 전쟁이 벌어져 아버지가 다시 가야 한다면.
“내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할 수 있다. 아버지가 살아 있고 군인인데 다시 한국을 가게 된다면 망설이지 않고 안녕이란 인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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